300년 전 문예부흥기의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 간 한 화가가 있었다. 누군가는 근본도 모르는 광기어린 환쟁이라 하였고, 다른 또 누군가는 못 그리는 것이 없는 조선 최고의 화가라 칭송하였다. 정작 그 사내는 그저 자신의 뜻대로 붓을 들어 화폭을 채웠다. 그리고 먼 훗날 자신과 자신의 그림을 알아볼 사람을 기다렸다. 자유로운 영혼의 화가 칠칠 호생관 최북 거기에 그가 있었다.
방외사 최 북(崔北)
9세기에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자른 광기를 부렸다고 한다.
그로부터 약 1세기 반 전에 조선에서는 화공(畵工) 〈최 북〉이 송곳으로 자기 눈을 찔러 스스로 외눈박이가 되었다. 그로 인해 최 북이 광인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그는 결코 광기를 부린 것이 아니었다.
본관이 무주(茂朱)인 최 북은 1712년(숙종38)에 태어난 중인(中人)출신 화공이다. 그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화공들 거의가 중인 출신이었다. 그때는 사대부에서 일부가 화공들을 환쟁이로 멸시하던 시대였다.
그러나 철저히 방외사였던 최 북은 평생을 자유주의자로 살았다. 그런 가운데 자신의 그림에 대한 자부심은 하늘에 닿았다. 그 자긍심이 지나쳐 때로는 오만으로 비쳐졌고, 사람들이 그걸 광기로 여겼다.
최 북이 광인으로 보였던 것은 그의 기인적인 행동이었고, 대개는 주벽 때문이었다.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오로지 술과 그림에만 삶의 의미를 두었다. 그러다 보니 늘 곤궁하게 살았다. 그가 '붓을 놀려 먹고 산다'는 의미로 호생관(毫生館)이라는 호를 지은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결국 생존을 위해서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최 북은 술과 관계되는 일화를 많이 남겼다. 금강산 기행 중에 '천하의 최 북은 마땅히 천하 명산에서 죽어야한다'면서 구룡연에 뛰어들었고, 술값이 없어 집 울타리를 뽑아 술과 바꿔 먹었고, 나라에서 금주령을 내리자 상가(喪家)를 돌며 대곡(代哭)하며 술을 얻어 마셨다. 그럴 정도로 애주가였다. 그렇다고 결코 비굴한 적도 없고,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여 안주할 생각도 가진 적이 없었다.
최 북이 스스로 눈을 찌른 것도 결국 그림에 대한 자긍심 때문이었다. 최 북은 그림을 구하러 온 거만한 양반이 자신을 멸시하는 태도를 보이자, 오히려 그를 능멸하며 송곳으로 자해했던 것이다.
그러한 삶 중에도 최 북은 그림 제작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초옥산수草屋山水' '조어산수釣魚山水' '풍설야귀인風雪夜歸人' '관폭도觀暴圖' '금강전경도金剛全景圖' 등의 걸작을 많이 남겼다.
최 북은 75년을 사는 동안 고독과 가난과 때로는 멸시 속에서도 자신의 예술세계 대한 자부심만큼은 한시도 버린 적이 없었다. 그는 그림뿐만 아니라 시(詩) 서(書)에도 고루 능했다.
그러한 가운데 많은 걸작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생애 마지막 날에도 술에 취하여, 주막에 그림 한 폭을 던져놓고 귀가하던 중에 눈 속에 파묻혀 죽고 말았다. 그것이 자유인 최 북의 인생이었다. 금년이 마침 최 북의 탄생 삼백주 년이 되는 해로, 우리는 그를 또 다른 각도로 이해해야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