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쟁적 회통이론과 저항적 비판이론
그리고 부드러움의 철학
시나브로 지난 삶의 여정을 회상할 즈음이면, 죽음의 그림자가 이미 삶의 언저리를 서성인다. 그런데 그 그림자를 두려워하게 되면, 이제 남겨진 삶의 여정은, 너무도 고통스런 ‘고난의 행군’이 되어버린다. 누구라도 그러하겠지만, 지난 시절을 회상하면, 온갖 회한만이 찾아들기 십상이다.
그저 살아내는 동안, ‘오늘도 무사히’ 하면서 하루하루를 겨우겨우 견뎌냈는데, 수십 년을 살아냈는데도, 삶의 상황은 여전히 별반 나아진 게 없다. 그런 것이 인생인 모양이다. 요행히 아주 대단한 행운을 움켜쥐었다면 모르겠으나, 현실세계의 절대 다수는, 고만고만한 욕망의 충족에 만족하며, 그저 그렇고 그런 삶을 살아낼 따름이다.
그러니 그런 극소수의 엄청난 행운을 天運이라고 하는 것이다. 천운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운수’라는 의미다. 그러니 그 확률이 천문학적인 수준을 넘어서서, 인간존재의 인식 차원을 넘어서는 天數學的인 차원으로 접어들어버린다. 그런 천운의 주인공이 아니라면, 나머지 절대 다수 인간존재의 삶이란, 죄다 ‘도토리 키재기’ 식의, 오십보 백보일 따름이다.
그래서 먼저 살아낸 이들이면 죄다, 삶의 고통과 삶의 허무를 논변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청춘의 시절에는, 그런 얘기들이 당최 납득되지 않는다. 필자의 아둔한 체험에 의하더라도, 인간은 직접 체험하지 않는 한, 결코 깨달을 수 없는 존재임이 자명하다. 그러다보니 ‘지금 아는 것을, 좀 더 일찍 알았다면’ 하며 안타까워 하지만, 인생의 수레바퀴는 결코 되돌릴 수 없다.
그렇다면 후회와 회한 속에서 늙어가며 죽음을 맞이하면 되는 것인가. 이미 지나버린 상황을 후회하는 일은, 실상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차피 인생이란, 進退兩難이며 四面楚歌일 따름이다. 실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채로, 시나브로 늙어가고 죽어가는 것이 인생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현실세계의 절대적 다수는 弱者이며 被支配者이다. 애당초 지구별 안에서, 强者이며 支配者가 될 수 있는 자는 극소수일 따름이다. 예컨대, 한 가족 안에서도 강자는 단 한 사람이며, 그 외의 구성원은 그를 추종해야 한다. 이러한 원리는, 확장된 집단공동체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지구별에서 가장 거대한 집단인 국가의 경우에도 그러하다. 수백여 개의 국가공동체가 있지만, 覇權國은 단 하나일 따름이다. 그 외의 국가들은 좋든 싫든 패권국을 추종해야 한다. 그런 것이 생존의 방식이다. 다만 간혹 역사 안에는, 그러한 원리에 저항하는 자들이 있다. 결국 그런 자들의 삶은 고통과 고난으로 점철된다.
그런데 아주 기괴하게도, 절대적 다수의 약자들은 그런 고통과 고난을 감내하는 자들을 숭앙한다. 그것은, 자기도 그런 강자가 되고 싶지만, 애당초 그러한 역량을 지니지 못한 탓에, 어쨌거나 부드러운 다수로서 근근이 생존해야 하는 상황에 대한 反動이다.
그러한 인간존재의 二律背反的 삶의 방식을, 지극히 논리적으로 간파한 최초의 철학자가 老子다. 노자의 철학사상은 본래 帝王學으로서의 성향이 강하지만, 그 이면에서 작동하는 원리는, 약자로서 절대 다수의 인간존재를 목적하므로, 원효의 철학사상에 대해 시기적으로 先導的인 양상을 보여준다.
“천하에서 물만큼 柔弱한 것은 없다. 그러나 堅强한 것을 극복하는 데는, 물보다 강한 것이 없다. 유약은 물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면서, 동시에, 노자철학의 중요한 특징이다. 노자가 볼 때, 유약한 물의 본성은, 곧 道의 속성이기도 하다.
예컨대,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유약하지만, 죽으면 견강해지기 때문이다. 초목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상적인 삶의 방향은, 표면적으로 볼 때, 견강한 것이 아니라, 이면에 유연함과 유연함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유약하면서도 견강하고, 견강하면서도 유연할 때, 비로소 이것을 진정한 천하의 至柔라고 할 수 있다.
노자가 유연한 물의 성질과 이미지를 자연현상에서 체득하여, 인간존재의 이상적인 본보기로 삼은 것은, 충분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때문에 노자는, 虛에 오히려 창조적 활동이 있음을 강조한다. 허의 지극함에 이르고, 고요함을 돈독히 하면, 만물이 더불어 지어진다는 표현처럼, 노자는, 참된 존재와 인식에 도달하면, 모든 대립이 용해되어, 진정한 평화에 이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노자의 허와 靜은, 단순히 삶의 소극적 태도를 존중하는 의미 이상의 무엇을 지시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참된 존재는 한정된 형상이 아니며, 무형상적 허가 모든 형상을 형상이게끔 해주는 근원적인 존재임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감각적으로 지각되는 운동이나 변화의 현상은, 본래 그대로인 정적인 본성 그대로의 자기표현일 뿐이며, 또 필경 본성으로 복귀될 수밖에 없는 것들임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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