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멸
"선생님! 오늘은 토요일이니까 병원엘 일찍 갔다와야겠는데 어쩌나 그동안 심심하셔서… 내 얼핏 다녀올게 혼자 공상이나 하시고 눠 계세요, 네."
명숙이가 이렇게 말하면서 영철이 머리맡에 놓인 아침에 한금밖에 아니 남았던 물약을 마저 먹어 빈병이 된 걸 집어가지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영철이는 명숙이가 하루 건너 여기서 오리나 되는 병원으로 약을 가지러 가는 때면 아닌 게 아니라 주위가 갑자기 쓸쓸해져서 견딜 수 없었다. 진종일 꼬박이 누워 있어야 찾아 오는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다. 오직 명숙이 하나만이 자기 옆에서 모든 시중을 들어 줄 뿐이니 병으로 앓는 것보다도 사람의 소리, 사람의 모습이 무한히 그리워 그것이 더 한층, 병들어 누워 약해진 자기의 마음을 속속들이 아프고 저리게 한 적이 많았다.
오늘도 명숙이가 나간 다음 죽은 듯이 고요해진 텅 빈 방안에 홀로 누워 두눈을 떴다 감았다 하면서 그의 돌아오기를 기다리기가 과시 안타깝고 지루하였다. 가만히 드러누운 채 곁눈질로 방안을 둘러보니 문틈으로 스며들어오는 햇살이 그나마 눈부시게 하며 발 얕은 네모진 책상 위에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채색칠한 사기 화병에는 일전에 명숙이가 병원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꺾어온 진달래와 개나리꽃이 섞여서 꽂혀 있는데 약간 시들기도 하였고 더러는 낙화가 져 하얗게 빨아 덮은 책상보가 색실로 수놓은 것 같이 보인다.
모란봉을 바라보고 떼를 지어 올라가는 꽃놀이꾼들의 흥에 겨워 웅얼대고 지껄이는 남녀의 음성이며 또는 발자국 소리가 길에서 이따금씩 일어나 귀를 스치고 지나가면 뒤미처 좀 조용해진 듯 하자마자 겨우내 꽝꽝 얼어붙었던 대동강의 얼음이 봄을 맞아 녹고 풀려서 이제는 바위 언저리와 돌부리에 그루박 지르듯이 부딪치는 크고 작은 파도 소리가 제법 요란스럽게 들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