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눈에 보이는”
자신의 얼굴 상태가
‘더럽다’ or ‘깨끗하다’
둘 중의
어떤 〈개념〉에
부합되는지를
알고 싶었던
철학과의 그 굴뚝청소부가
〈자신의 얼굴〉을
〈인식되는 대상〉으로
삼아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로
〈착각(錯覺)〉하고
“더러운”
〈타자의 얼굴〉을
보고
〈자신의 얼굴〉도
“더럽다”는
〈개념〉을
선택하여
‘내 얼굴은 더럽다’...는
판단을 내린 후
알고 보니
〈자신의 얼굴〉은
“깨끗하다”는
〈개념〉을
선택해야 하는
상태였음을 알고
“인식하는 주체와
인식되는 대상이
양분(兩分)되면,
인식된 게
사실과 일치하는지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다.
그렇다면
진리란
불가능하단 말인가?
진리에 도달하려는
근대철학자는
이런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는
이 난국을
빠져나가기 위해
여러 가지 탈출구를 찾아낸다.
...
‘철학’과
‘굴뚝청소부’라는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를
붙여서
책 제목으로
다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뭔 개 풀 뜯어먹는 소리야?
어이가 없네 ...
하는 짓이
물 위에 비치는
뼈다귀를 물고 있는
개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 개가 물고 있는
뼈다귀까지 빼앗고 싶어서
컹컹 짓다가
자신이 물고 있던
뼈다귀를
물에 빠뜨려 버린
개(dog)
and
배를 타고 가다
강 한복판에서
아끼던 칼을
강물에 빠뜨린
초나라의 한 젊은이가
배 위에다
표시를 하고
‘칼이 떨어진 자리에
표시를 해놓았으니
찾을 수 있겠지.’」
... 라고 생각하고
배가 언덕에 닿자
뱃전에서 표시를 해 놓은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
칼을 찾았으나
칼은 없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이
그의 어리석은 행동(行動)을
비웃었다. ... 는
그래서
바보멍청이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각주구검(刻舟求劍)이라는
고사의
주인공과
“(차이를) 발산하는 계열들”을
찾을 수 없는
‘아니
세상에
이런
바보멍텅구리도 있나?’
... 라는
생각밖에 들게 하지 않는
『철학과 굴뚝청소부』 라는
책의
뒤표지에 실린
text를
읽고 난 후
“물결처럼 진행되는”
사유의 과정을
그대로
술이부작(述而不作)한
“내용(직관) 없는 형식(개념)은 공허하고,
형식(개념) 없는 내용(직관)은 맹목적이다.”
... 는
칸트가 정식화한
〈인식론의 기본 명제〉에
충실한
“개념 없는”
〈극단적 이기주의자들〉
즉
“나쁜 짐승을 길들이는 훈련자”로
자처하는
〈플라톤적 사제들〉의
〈금욕주의적〉 삶의 방식을
“약자의 허무주의”라
비웃으며
자신들의
〈극단적 허무주의〉를
욕망을
그 어떠한 경우에도
절제하거나
스스로 억압하지 않는
“강자의 허무주의”라고
칭하고
선각자(先覺者)들이
목숨을 걸고
“걸으면서”
기록한
소중한
text를
“앉아서 하는 유목”을 통해
원작자의
〈주제 의식〉이나
〈미학적 의도〉 ...
그런 건
〈 개나 주라고~ 〉
“해석은
도용(盜用)이자
전유(專有)다.”
라고
주장하며
낱낱이
해체(解體)한 후
자신이 필요한 말만
쏙쏙 골라서
장인의 솜씨라고
감탄할 수밖에
없는
짜깁기
솜씨로
어떻게?
〈정신적 노동자〉로
평생을 살아오면서
“앉아서 하는 유목”을 통해
습관화한
text를
짜깁기하는
숙련된 솜씨를
마음껏 발휘해서
자신의
독창적인
작품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나쁜 짐승”
“게으르고 악해서”
“얼굴이 깨끗한”
딜레마에 빠진
철학과 그 굴뚝청소부의
text가
〈의미〉하는 바를
독자들이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술이부작(述而不作)한
인식론적 고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