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곡(李穀) 가정집(稼亭集)
고려말(高麗末) 원(元)나라 유학파(遊學派) 석학(碩學) 이곡(李穀)
‘이곡(李穀, 1298~1351)’의 ‘가정집(稼亭集)’에는, 고려말(高麗末)의 시대상(時代相)과 통치(統治)를 위한 정치철학(政治哲學)에 대한 논의(論議)가 세밀히 기술되어 있다.
‘이곡’은 당시 세계적(世界的) 패권국(覇權國)이던 원(元, 1271~1368)나라가 차츰 쇠망(衰亡)해가고, 고려(高麗, 918~1392) 역시 쇠퇴(衰退)해가는 시기를 살아냈다.
물론 ‘이곡’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그러한 쇠망의 기운이 확연(確然)하지는 않았을 것인데, ‘이곡’이 사망하고서 17년 후에 원나라가 멸망했고, 41년 후에 고려가 멸망했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곡’의 ‘가정집’을 통해, 원나라 말기와 고려 말기의 역사적(歷史的) 상황에 대해 모색(摸索)할 수 있으므로, 참으로 소중한 저작(著作)이다.
‘가정집’과 같은 사적(私的) 저술(著述)들은, 공적(公的) 관점에서 저술되는 자료와 달리, 단지 왕조(王朝)를 우선적(優先的) 중심(中心)으로 해야 하는 프로파간다 역할(役割)로부터 다소 자유(自由)로우므로, 그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특히 이씨조선(李氏朝鮮) 이전의 자료들은, 대체로 이씨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철저히 이씨조선 방식으로 재단(裁斷)되었다.
예컨대, 고대사(古代史)와 관련하여, 세조(世祖) 시절 수서령(受書令) 같은 사건이 대표적 사례(事例)로 거증(擧證)될 수 있다.
그러한 상황(狀況)의 유발(誘發)은, 이씨조선을 건국(建國)하면서 천명(闡明)된 친중(親中) 사대주의(事大主義) 선언(宣言)을 공고(鞏固)히 함으로써, 이씨조선 왕권(王權)을 존속(存續)시키려는 의도(意圖) 때문이다.
따라서 그런 역사적(歷史的) 정황(情況)을 감안한다면, ‘가정집’과 같은 저작이 일실(逸失)되지 않고 전해져서, 이렇게 독서(讀書)할 수 있다는 것은, 실로 다행스럽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나아가 ‘가정집’을 통해, 비단(非但) 친중(親中) 사대주의(事大主義) 풍조(風潮)가, 왕씨고려(王氏高麗)라고 해서 이씨조선(李氏朝鮮)과 크게 별다르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아주 인상적(印象的)인 사실이다.
예컨대, 우본국재상서(寓本國宰相書)를 살피면, 고려(高麗)의 국왕(國王)이 원(元)나라 승상(丞相)의 신분이었음이 기술(記述)되어 있다.
그리고 선진국(先進國)이었던 원나라에 유학(儒學)하고, 원나라에서 시행하는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는 일이, 어떤 권능(權能)을 지니는가에 대해서도 여실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 고려말(高麗末)에 이르러 고려(高麗)는 원(元)나라의 속국(屬國)이었고, 조선초(朝鮮初)에 이르러 조선(朝鮮)이 명(命)나라의 속국이었음을 방증(傍證)할 수 있다.
이는, 근대(近代) 이후 21세기에 이르도록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서양문명(西洋文明)의 중심지(中心地)인 미국(美國) 유학이 선호(選好)되는 현상과 별다르지 않다.
다만, 조선말(朝鮮末)에 이를수록, 그 사대주의(事大主義)의 정도(程度)가 더욱 강해졌다고 할 것이다.
이곡(李穀)은, 1298년(충렬왕24)~1351년(충정왕3)까지 생존했던, 고려(高麗)의 문신(文臣)·학자(學者)이다.
자(字)는 중보(仲父)이고, 호(號)는 가정(稼亭)이며, 시호(諡號)는 문효(文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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