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주마등처럼 흐른 세월이 한 순 배 돌아 다시 다다른 예순 즈음이면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평소 무감각했던 중력(Gravity)을 느끼고, 죽음의 여정에 대한 경각심을 갖기 마련이다.
이건 진리(眞理)이자, 누구나 따를 수밖에 없는 삶의 근본 이치이다.
이렇듯 우리는 평소에는 지각(知覺)하지 않지만, 나이가 예순 즈음이면 삶이란 죽음을 향해 내달리는 질주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렇더라도 사람마다 제각기 생각이 다르듯 삶의 형태나 형식 또한 다르다. 하지만 우리가 삶의 여정에서 뒤돌아 지난 세월을 더듬다 만나는 가장 가슴 설레던 때는 역시 소년의 기를 지나 청년으로 성장하던 바로 그 지점 곧 사춘기 지점이다. 여성도 같은 성향을 띠지만 특히 남성에게는 비록 나이가 들어도 사춘기에 겪은 첫사랑의 감정으로 심장이 두근대던 때, 그때 심장을 뜨겁게 달구며 가슴을 뛰게 하던 눈에 든 첫사랑 소녀, 그 소녀의 모습은 일생을 두고 잊힐 리 없다.
이렇듯 첫사랑 소녀가 잊히지 않는 이유는 그 소녀가 나를 복제할 한 쌍의 성 염색체(XX 혹은 XY) 중의 반을 채줄 대상인 이유이다.
김 노인은 예순을 훌쩍 넘겨 일흔을 향해 가는 삶의 노정에서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을 겪었다. 어느 날 김 노인은 예상치 않게 거리에서 홀연히 실신했다. 김 노인이 실신한 직접 원인은 재판에 임한 데서 오는 과로지만, 그 과로가 첫사랑 여인 순정 홍!을 불러 김 노인 앞에 세웠기 때문이다.
김 노인이 ‘순정 홍’을 처음 만난 것은 청계천 변 전화기 수리 센터에서 전화기 수리 공으로 일하던 때였다. 그때 김 노인의 나이 열여덟이었다. 천신만고 끝에 도달한 전화기 수리 공의 자리, 그 자리에서 김 노인은 순정 홍!을 처음 만났다. 어쩌면 김 노인을 오늘의 자리에 있도록 한 이가 바로 그녀, 순정 홍!이다.
순정 홍!을 처음 만난 그때부터 김 노인은 순정 홍!만을 위해 살기로 맹세했다. 치기가 부른 그 추동력 탓에 오늘의 김 노인은 상당한 재력을 모았다. 물론 김 노인이 오늘의 그 재력을 쌓기까지 여러 번에 걸쳐 죽음의 문턱을 넘어야 했다.
그런데 그 죽음의 문턱에서 항시 김 노인을 일으켜 세운 이가 바로 첫사랑 순정 홍!이다.
김 노인이 자신을 불사신으로 여긴 연원은 어머니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가 그 시발점이기는 하지만, 지난 삶의 여정에서 자신이 죽지 않고 생명을 이어온 데는 매 순간 순정 홍!만을 위해 살겠다는 그 다짐, 그 맹세가 있었고, 바로 순정 홍!에 대한 그 첫사랑 열정의 지지 때문이었다.
이 소설은 바로 이 김 노인 삶의 여정을 다루고 있다. 김 노인에게 노욕을 불태우도록 한 것 역시 다름 아닌 사춘기에 만난 기억 속의 첫사랑 연인 순정 홍!이다. 순정 홍!을 향한 김 노인의 청순한 마음을 이 소설은 예찬한다. (2024. 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