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돌아올 것인가
이것은 돌아오는 자들의 이야기이다.
칼리는 어쩔 줄 모르며 공동생활에 참전해 왔다. 생활하던 곳에서 떠밀려 나온 칼리의 삶은 여전히 어쩔 줄 몰랐지만, 무엇으로부터도 독립되어 있는, 그러나 이질적인 존재에게 내려질 조롱과 야유를 감수할 용기가 전제된 길에는 동의한다. 동의한 바 외에 다른 만족이 없다면 그것은 실상 의무와 다를 바 없다. 이 삶이 액면 그대로 실천될 수 있을지에 대한 결과론을 각색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표상으로서의 ‘들쥐의 삶’을 가능한 만큼 체험하고 기록해 낸 시간을 들추는 일이야 가능할 것이다. 칼리가 두통이 있는 척 연기를 하는 것으로 진짜 고통들은 성공적으로 칩거한다. 그는 어떤 고생에도 앙심을 품지는 않지만, 다분히 타협적이다 하는 가책을 피할 수는 없다. 이 지점에서 딜레마가 되는 것은 생존에 대한 문제, 즉 먹고 싸는 문제였는데, 칼리는 확실치 않은 어떤 병증으로 인해 제대로 잘 보지도 잘 먹지도 잘 배설하지도 못하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불안은 외적 자존에 반응하는 개념의 탈을 쓰자 은둔을 제어하지 못하고 자타공인 세련된 사람으로 데뷔한 비츠를 연상케 한다. 들쥐의 양심은 사회 통념에 대한 충성을 능가할 수 있을까에 대한 화두. 칼리의 물음표는 비츠라는 단서와의 고릿적 이산으로 기억되는 위기를 이정 삼아 그를 찾아가야만 한다. 추억의 카레도 칼리를 따라붙는다. 이 이야기는 진실된 인간성의 재량을 쫓는 데 있어서 칼리를 필수적인 통증 그 자체라고 간주한다.
예전 그 언젠가 칼리와 비츠는 함께였다. 비츠는 칼리에 대한 희미한 기억만 남겨두고, 호위 호식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아직 자신이 통념적으로 패배했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방향에는 지난함이 있으리라 예상하지 못한 바 아님을 어찌나 모른 척 해왔는지, 실행이 흥정을 실패했을 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가에 대한 증거를 보급받지 못한 비츠는 겁을 먹었다. 위축이 주도한 끝없는 유예는 실행에 대해 과대평가된 상상력을 부추기고, 그것에 동경하면서도 두렵게, 확신하면서도 외면하게 만들었다. 실행이 없는 사람. 쪽박 찬 열정에 이미 매각한 ‘사회 통념’을 다시 끌어와 소일거리로서 활용하자는 기 막힌 아이디어로 발등에 불이 붙을 그날까지만 버틸 ‘스탠바이’에 기여하는 사람. 통념의 재미에 맛 들린 비츠는 가꾸고 정돈하고 흉내 내고 소위 라이프 스타일에 심취한다. 통증과의 교제를 감득한 이에게 탈선의 재미는 불행을 가중하는 법, 불행의 유효기간을 예감한 비츠는 묘한 안심감을 느끼며 ‘역대급 카레’라는 기폭 장치를 준비한다.
다행스럽게도 때가 되어, 내면은 배신에 대한 급부를 요구함으로써 언약대로의 촉구를, 자선에 가까운 질문을 불어넣어 준다. 문득 비츠 자신에게 스스로를 소개하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물론 신선한 이야기는 아니다, 묵어있던 것이 재개되었을 따름이니. 비츠는 잃어버린 통증을 견지하며, 통증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현실화된 바 없기에, 그리하여 한편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만찬을 열고, 현실 개념의 일행들을 초대하고, 그들과 함께 누려왔던 것들의 차안대를 벗기고자 한다. 통증은 변화의 지레가 움직이는 양감만큼 가능성으로서 현실화된다. 통증은 비츠에게 돌아온다. 통증이 복귀한 만큼의 존재, 비츠칼리가 진실된 시간을 자신에게, 자신을 보유한 진실성에게 바친다.
감각은 구조적 표명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 가령 비츠칼리에게 지극히 현실적이라고 느껴지는 일, 또는 공상으로 가득 차서 의미는 온통 비어있다고 느껴지는 고독은 각자 정신이 팔려 서로를 알아보지 못 하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어떤 허락에 의한 보고에 의하면, 누구나 자신만의 장치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자신의 형태적인 에너지를 관찰할 수 있는 기회 또한 주어져 있다는 것이다. 추억을 통한 관념과 개념을 통한 관념이 순환하는 궤적을 따라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그에 대한 기술적인 보고서뿐만 아니라, 무궁자재한 보고서 또한 동시에 첨부되어 있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