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공상 과학 소설은 전설적이거나 영웅적인 삶, 또는 죽음을 말하지 않으며, 이기적인 행복, 처지의 구원 같은 위안은 물론이요, 어법과 공식에 대한 어떠한 미혹도 없다. 이 이야기는 경이롭되 단지 그뿐인 현상을 설명하는 방정식이 아니며, 그 때문에 어떠한 형태로든 현상적인 재미를 제공하지 않는다.
현상의 재현은 교묘한 반복에 빨려 들어갔고, 다채로운 서술들이 끝없이 서로 손을 잡았지만, 이 우주비행사의 이야기가 그런 매력을 계승하는 것은 아니다. 우주비행사에게는 이상이 있었으니, 이것은 현실에서 지표적으로 논할 수 있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이면을 향하는 것이다.
현상에 따르는 보편 정서를 파고들다 보면 정확히 그 용적에 해당하는 막다른 종결점에 다다르기 마련이다. 그것은 군더더기 없는 단상이다. 그러나 그의 이상은 주체를 단상에서 쫓아낸다. 왜일까, 이 아늑한 고뇌에서, 이를 고뇌라 이르지 아니하도록 무언가가 결여된 만족과 고통, 이를 고뇌라 치지는 말자. 무언가는 무엇인가? 아니면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가 문제인가? 학습된 이야기에 또 하나의 시선을 얹고, 발굴하고, 재건하는 조직에 뛰어들어, 모의고사의 답변처럼, 또는 반박 불가의 취향처럼 말끔하고 안전할 재현, 그것이 찾던 앎이라고 차마 말할 수 없기에, 규범적인 자리를 뜨려면 천국 다음가는 미지는 모름 그 자체이지 않은가.
그 덕에 가능성은 남겨져 있다. 되풀이되는 이야기에 관해서는 더 이상 할 말이 남아있지 않다는 뜻이거나, 아직 남아 있는 할 말을 쓰려고 모험을 떠났다는 뜻이다. 완전히 새롭게 모른다면 할 일은 남아있다.
어떤 양심적인 사람은 말했다. 의미는 다가올 것에 닿는 경로요, 길이요, 다리라고. 그렇다면 먹이를 주며 발을 묶는 의미에 대해서는 이제 잘라낼밖에. 혹은 의미의 경계를 몰라 칼로 자르지 못한 것, 마치 찌꺼기로 이루어진 모든 것처럼 보이는 것은 주체와 맞닿은 전부가 맞기에, 그래서 이야기꾼에게는 새삼 칼이 필요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