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소개
400년 전에 쓰인 연애 소설이 지금 읽어도 전혀 낡지 않다면? 아니, 오히려 지금 쓰인 것처럼 생생하고 현대적이라면? 셰익스피어의 『십이야』가 바로 그런 작품이다. 난파선에서 살아남은 소녀가 남장을 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설정부터가 이미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비올라라는 이름의 이 소녀는 세사리오라는 남성 신분으로 살아가면서 예상치 못한 삼각관계에 빠진다. 그녀는 오르시노 공작을 사랑하게 되고, 공작은 올리비아 백작부인을 짝사랑하며, 올리비아는 남장한 비올라에게 반한다. 복잡하다고? 맞다. 하지만 이 복잡함 속에서 셰익스피어는 사랑의 본질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보여준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정체성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방식에 있다. 비올라는 남자 옷을 입고 남자처럼 행동하지만, 그 과정에서 오히려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한다. 성별이란 무엇인가? 사회적 역할이란 무엇인가? 진정한 나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특히 성별과 정체성에 대한 기존 관념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지금,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들은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사랑 이야기도 놀랍도록 현대적이다. 올리비아가 여성으로 알고 있던 세사리오에게 끌리는 설정은 사랑이 성별을 초월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외모나 사회적 지위가 아닌, 그 사람의 내면과 본질에 끌리는 것이다. 앱으로 사람을 만나고, 프로필 사진으로 첫인상을 판단하는 시대에 이런 메시지는 더욱 의미 깊다.
하지만 이 작품이 단순히 진보적인 메시지만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셰익스피어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위선을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한다. 특히 말볼리오라는 인물을 통해 사회적 상승 욕구에 사로잡힌 현대인의 모습을 미리 그려놓았다. 그가 겪는 일들을 보면 직장 내 괴롭힘이나 가스라이팅 같은 현재의 문제들이 떠오른다.
어릿광대 페스테라는 캐릭터도 흥미롭다. 그는 바보인 척하면서 가장 현명한 말을 하는 존재다. 언어유희를 통해 진실을 전달하고, 마지막에는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로 들려준다. 그의 존재는 작품 전체에 철학적 깊이를 더한다. 웃음 속에 숨겨진 지혜, 가벼움 속에 담긴 무게를 느낄 수 있다.
이번 번역본의 가장 큰 장점은 '읽기 쉬움'이다. 원작의 고어체와 복잡한 수사법을 현대 한국어로 자연스럽게 옮겨, 셰익스피어를 처음 접하는 독자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특히 의역본이라는 접근 방식을 통해 원작의 정신과 재미를 살리면서도 한국 독자들에게 친숙한 언어로 재탄생시켰다. 연극 대본으로 쓰인 작품인 만큼, 실제로 배우가 말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대사로 번역한 것도 특징이다.
무엇보다 이 책에는 상세한 작품 해설이 포함되어 있다. 단순히 줄거리를 요약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현대적 의미와 문학사적 가치,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이 작품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깊이 있게 분석했다. 작품을 읽고 난 후 해설을 통해 놓쳤던 부분들을 다시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400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여전히 유효한 이야기들이 있다. 사랑의 착각과 진실, 정체성의 혼란과 발견, 사회적 편견과 진정한 가치, 그리고 인간의 본질적 외로움과 연결에 대한 갈망. 『십이야』는 이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특히 지금처럼 개인의 정체성이 유동적이 되고, 전통적인 관계의 형태가 다양해지는 시대에 이 작품은 더욱 큰 울림을 준다. SNS에서 여러 개의 페르소나를 갖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정한 자신이 무엇인지 묻는 비올라의 목소리는 절실하게 다가온다.
코미디라고 하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웃음 뒤에 숨겨진 아픔, 해피엔딩 속에 남겨진 질문들이 있다. 모든 갈등이 해결되고 커플들이 맺어지는 마지막 장면에서도 말볼리오만은 복수를 외치며 무대를 떠난다. 이런 균열이 작품에 깊이를 더한다. 진정한 화해와 용서가 무엇인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한 채 누릴 수 있는 행복이 진짜 행복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이 책을 읽는 것은 단순히 고전 문학 하나를 섭렵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셰익스피어라는 천재가 400년 전에 던진 질문들과 마주하는 것이며, 그 질문들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함을 확인하는 일이다. 동시에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거울이기도 하다.
사랑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원한다면,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면, 아니면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고 싶다면, 이 책을 권한다. 400년 전 이야기가 주는 현재적 충격을 직접 경험해보길 바란다.
* 이 책은 수익금의 일부를 어린이재단에 기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