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 년 전, 중남미에서 우리 옆집에 살던 한 가족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비극적인 파탄을 맞고 말았습니다. 첫째 딸의 이름은 혜연이었습니다. 봉제 공장에서 일했던 혜연 엄마는 폐병으로 급히 귀국했지만, 1년간의 폐암 투병 끝에 결국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빠는 도박에 빠져 사업 자금을 모두 탕진하고 다른 나라로 도망쳤습니다. 다행히 두 딸은 인접 국가에 살던 이모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습니다. 지금쯤이면 그 아이들도 어엿한 성인이 되어 각자의 삶을 살고 있겠지요.
혜연 엄마는 정이 많고 따뜻한 분이었습니다. 낯선 해외 생활에 막막해하던 우리 가족에게 현지 생활의 모든 것을 친절하게 알려주었습니다. 한인 슈퍼는 어디에 있는지, 은행은 어떻게 이용하는지, 생활에 필요한 정보들을 하나하나 가르쳐주셨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빠르게 현지 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고, 주말이면 함께 태평양 해안가로 놀러 가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고인이 된 혜연 엄마와 저는 6개월간 같은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생산 라인에서 일을 마치고 사무실에 들어와 답답하다며 가슴을 쓸어내리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때 제가 좀 더 적극적으로 병원에 가보라고 권했다면, 조기에 병을 발견해 지금도 건강하게 살아계셨을지 모른다는 아쉬움이 밀려옵니다.
혜연 엄마가 돌아가시고 가장인 아빠가 도망치자, 두 아이는 졸지에 다른 나라에서 부모 없이 세상에 남겨졌습니다. 국제 학교 초등 과정을 마치고 중학교에 진학한 첫째, 그리고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둘째. 아이들에게 엄마의 보살핌이 절실할 때 가족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아빠는 도박 빚에 쫓겨 곗돈마저 챙겨 달아났습니다.
사실 이 가족은 중남미에서 사업을 하며 살다가 중남미 생활을 접고 한국 안산에 정착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혜연 엄마를 찾아온 '김실장 언니'가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함께 봉제 공장에서 일했던 그녀는 중남미 자신의 공장에서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남편과 함께 일할 수 있고, 높은 급여와 퇴직금, 생활비, 그리고 연1회 한국 왕복 비행기 티켓까지 좋은 조건을 내세웠습니다. 혜연 엄마는 다시 중남미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지만, 남편은 그곳 생활을 원했습니다. 결국 혜연 엄마는 남편의 뜻을 따랐고, 그 결정은 불행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혜연 엄마는 김실장 언니의 공장에서 3년간 일했습니다. 퇴사 후 폐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투병 중에도 약속했던 퇴직금은 끝내 받지 못했습니다. 혜연 엄마는 병실에서 홀로 쓸쓸히 생을 마감했습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 평생 미싱을 밟아온 한 여인이 마흔 초반의 나이에 쓰러졌습니다. 남편은 밤마다 도박장을 전전하고, 주말이면 내기 골프에 빠져 살았습니다. 심지어 아내의 은행 수표에 허위 서명까지 해 돈을 빼가는 지경이었습니다. 수백 명의 직원을 관리하는 것보다 남편의 행위는 그녀에게는 더 큰 짐이었습니다. 공장의 먼지는 숨 쉬는 폐 끝에 파고들어 쌓이며 암의 씨앗이 되었고, 끝없는 스트레스는 씨앗을 크게 키워 죽음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누구나 해외로 떠날 때는 큰 꿈을 품습니다. 하지만 현실의 해외 생활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한국에서든 해외에서든 인생이 계획대로 흘러가는 경우는 드뭅니다. 특히 한국의 법적·문화적·정서적 울타리를 벗어나 낯선 땅에서 다시 시작하는 삶은 더욱 녹록지 않습니다. 젊은 시절의 짧은 여행이나 체험은 좋은 경험이 되지만, 장기 체류에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치밀한 준비와 굳건한 대안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해외 생활을 꿈꾸는 당신에게 묻습니다.
“당신이 국경을 넘는 목적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