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 약사(略史)
경희궁은 조성 배경부터 왜곡된 역사로 시작되었다.
광해군 시기, 가성비 떨어지는 교하천도론 대신 전통적인 양궐제도에 따라
경희궁은 인경궁과 함께 동궐 대비 이궁체제로 영건한 궁궐이었다.
하지만 인조반정 10년 뒤, 인조는 생부 정원군을 원종으로 추존하면서
광해군이 이곳의 왕기를 막기 위해 일찍이 궁궐을 조성했다고 갑자기 왜곡하였다.
이른바 새문동왕기설의 등장이다. 정원군의 신성함이 필요했던 것이다.
숙종은 경희궁에서 태어나서 경희궁에서 승하한 유일한 국왕이었다.
자신의 탄생지 성역화 차원에서 ‘서암(瑞巖)’을 조성하며 경희궁의 위상을 올렸다.
영조는 최장기 경희궁 임어 및 경희궁으로의 궁호 변경으로 서궐로의 위상을 굳혔다.
반면에 즉위 후 경희궁을 철저하게 외면한 정조.
경희궁은 국왕에 따라 호불호가 갈렸다.
대원군의 실리적인 정책에 따라 경희궁 전각의 부재를 이용하여 중건한 경복궁.
이때부터 이궁의 위상을 잃은 경희궁은 ‘뽕나무 궁궐’로 불리며 빈 궁궐이 되었다.
이후 대한제국 근대화의 실험공간으로 전환된 경희궁과 주변 지역.
일제강점기, 총독부중학교 조성을 시작으로 전매국과 총독부 관사들까지
낯선 것들이 들어서며 경희궁의 공간과 기억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서울시 경희궁 복원 사업으로 ‘기억찾기’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