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세기 중반(1945년), 열 살 터울의 51세, 41세의 노부모에게 태어난 늦둥이로, 일찍 온갖 풍상을 겪으며 세파를 경험할 때 얻어진 지혜만으로 살아가야 했으므로 조금은 민감한 慧眼으로 판단하려 노력한 체험이 남다를 수 있었다.
해방의 해에 태어나 민족상잔의 6.25를 겪었으며, 자유당 정권의 3.15 부정선거로 인한 학생 항거, 즉 4.19 학생운동을 거쳐 민주당 정권이 들어섰으나 곧장 군사政變인 5.16 쿠데타가 일어났다. 60~70년대에는 베트남 전선에 파병되어 참전 경험을 할 수 있었고, 박정희 정권은 장기 집권 후 1979년 10.26 대통령 시해 사건을 맞이했다. 이후 전두O 장군에 의해 광주 민주화 항쟁 시민운동인 5.18이 터졌으니, 내가 본 한국 역사는 대부분 軍이 만든 黑역사가 대종을 이루었고, 국민은 불안한 亂世의 암담한 시기를 견뎌야 했다.
그럼에도 다행히 우리 민족은 역동적이어서 끈질기게도 생존력이 강한 조상의 후예들답게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렇듯 어지러운 시대에는 가장의 역할이 가족의 삶에 있어 중요할 수밖에 없었기에 책임감이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경제력 조건이 최악이었던 필자는 성실과 신용이 전부였는데, 다행히 천사표 아내가 수많은 역경과 필자의 불같은 성정을 잘 견뎌 내며 인내해 주었기에 극도의 소자본으로 무작정 상경한 지 5년 만에 서울에서 보통의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기댈 곳이 전무한 것 같았으나, 연로하신 장모님께서 그나마 아이들(3남매)을 알뜰히 돌보아 주셨으므로 무엇보다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장모님께서 作故하신 후에야 뒤늦게 그 은혜를 깨달았으나, 사죄를 드릴 길이 없었으므로 한없이 회개할 수밖에 없음이 매우 큰 아쉬움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갓 태어난 첫딸의 눈동자와 마주쳤던 새벽과 늦은 밤중,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천사 미소가 필자에겐 유일한 위로의 힘이 되었다. 오직 그 사랑의 힘만으로 약속을 지킬 수 있었음은 숨 막힐 듯한 그 시대 속에서 필자의 꿈이 보통의 삶일 뿐, 그 이상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배짱 없던 필자는 오직 가족들이 보통의 삶을 누리길 기원했던 벅찬 시절을 보냈으며, 하루라도 빨리 아이들이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았다.
그러다 보니 가정교육을 자립심 위주의 신념으로 일관했으나, 그 점이 훗날 장점이 된 듯하다. 고맙게도 우리 삼 남매 가정 모두 남부럽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어 감사가 넘친다. 역시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심이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팔순의 삶 뒤안길에는 보은의 손길들이 많으나, 지금은 송구스러움이 가득한 채 한시름 덜었다.
그리운 님들에게 한량없는 감사를 올리며,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는 희망의 샘을 팔 수 있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