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현충원에서 만난 비밀 친구들
가을볕이 유난히 따스하게 내리쬐던 오후였습니다. 국립대전현충원의 넓은 잔디밭 위로 노란 은행잎이 비처럼 흩날리고 있었지요. 열두 살 준호는 할아버지의 주름진 손을 꼭 잡고 걷고 있었습니다.
평소 호랑이처럼 늠름하시던 할아버지였지만, 오늘따라 할아버지의 뒷모습은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처럼 조금 쓸쓸해 보였습니다.
“할아버지, 다리 안 아프세요? 벌써 한참이나 걸어왔잖아요.”
준호의 물음에 할아버지는 가던 길을 멈추고 환하게 웃으셨습니다. “허허, 준호야. 할아버지는 괜찮단다. 오히려 이 길을 걸을 때면 가슴이 아주 설레거든. 이제 다 왔다. 할아버지의 ‘비밀 친구들’이 있는 곳이야.”
[은행나무 아래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름 없는 영웅 이야기]
할아버지가 멈춰 선 곳은 커다란 묘비들이 줄지어 선 작은 묘역이었습니다. 준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묘비를 살폈지요. 그곳에는 준호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낯선 이름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름 위에는 파도 무늬처럼 새겨진 짧은 글자가 적혀 있었습니다.
[독도의용수비대]
“독도요? 할아버지, 우리가 아는 그 바다 멀리 있는 섬 말이에요?” “그렇단다, 준호야. 이분들이 없었다면 아마 지금쯤 독도에는 우리 태극기가 휘날리지 못했을지도 몰라.”
할아버지는 주머니에서 깨끗한 손수건을 꺼내 묘비에 쌓인 먼지를 정성스럽게 닦아내셨습니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어깨를 토닥여주는 것 같았지요.
“준호야, 사람들은 독도가 그냥 우리 땅이라고 생각한단다. 하지만 70년 전, 나라가 전쟁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힘겨웠던 시절이 있었어. 그때 독도는 마치 부모 잃은 아이처럼 바다 한가운데 홀로 남겨져 있었지.”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나라에서도 지켜주지 못하던 그 외로운 섬을 향해, 일본 배들이 호시탐탐 다가오고 있었어. 그때였단다. 울릉도에 살던 서른세 명의 젊은 청년들이 오직 맨손으로 일어선 거야. 군인도 아니고, 국가가 시킨 일도 아니었는데 말이야.”
[12살 준호, 1953년 독도의 바다로 시간여행을 떠나다.]
“겨우 서른세 명이요? 무기도 없이 어떻게 지켰어요?” 준호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할아버지는 준호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나지막이 속삭이셨습니다.
“그게 바로 기적이라는 거야. 진짜 총 대신 나무를 깎아 대포를 만들고, 빗물을 받아 마시며 차가운 바위 위에서 잠을 잤던 형과 아저씨들. 세상은 그들을 ‘이름 없는 영웅’이라고 부르지만, 할아버지는 이분들을 ‘독도의 불침번’이라고 부른단다.”
바람이 윙 소리를 내며 지나갔습니다. 준호는 묘비 뒤로 펼쳐진 파란 가을 하늘이 꼭 독도의 바다처럼 보였습니다. 70년 전, 그
[거친 파도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았지요.]
“준호야,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이 이야기는 꾸며낸 동화가 아니란다. 네가 지금 딛고 서 있는 이 땅을 지키기 위해 청춘을 바친 진짜 영웅들의 기록이지. 자, 이제 할아버지와 함께 1953년, 그 뜨거웠던 독도의 바다로 시간여행을 떠나볼까?”
할아버지의 따뜻한 손을 잡고 준호는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이제 곧,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지만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독도의 위대한 비밀이 펼쳐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