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과 사‘의 구분은 정말로 육체의 존재만을 기준으로 할까요?
어쩌면 우리는 삶이라는 것은 살아서도 죽은 상태이고, 죽었으면서도 살아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꿈도 없는 깊은 잠에 든 상태를 생명의 상태로 볼 수 있는 건지?
반대로 의식의 부재와 출현 사이의 짧은 공간에 존재하는 꿈의 세계, 혹은 무의식이 도출되는 상태에서 찰나의 순간 나타나는 신비로운 현상의 인식.
그렇게 삶과 죽음의 상태가 무차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지만 우리는 그런 것들을 모두 비현실적인 몽상의 세계, 혹은 정신 착란의 분야로 치부해 버리고 무시하는지 모릅니다.
실은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최대의 행복은 깊이 잠든 상태. 하지만 그 상태는 인식할 수 없기에 기억할 수 있는 최대치의 접근인 꿈결의 상태라고 합니다.
육체를 제외하고 논하자면 어쩌면 그렇게 우리는 삶과 죽음의 세계를 수시로 교차하며 사는 건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진정 중요한 본질은 그 죽음의 공간에서 배우는 것인지도요.
그럼에도 우리는 왜 반드시 잠에서 깨어야 하고, 힘든 현실 세계로 돌아와야 하는 걸까요.
이 현실 세계에 대해 무엇이 숨어 있기에 마치 정해진 궤도처럼 이 세계로 돌아와 쳇바퀴 돌 듯 하루하루를 살아내야 하는 걸까요.
이 소설은 바로 이 현실로 돌아와야만 하는 이유를 찾는 소설입니다.
이 현실은 바로 생명이 살아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생명이 없다는 고통도 없습니다. 대신 기쁨도 없고 사랑도 없겠죠.
중음의 세계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해석이 분분합니다. 대게 불교에서 말하는 중음의 의미를 따르는데 삶과 죽음의 중간 지대에서 심판을 받는 공간이자 시간이라고 하죠.
혹은 죽은 자들이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강한 의식 때문에 떠돌며 머무는 공간이라 합니다.
이 소설은 바로 중음의 세계를 직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필자의 경험으로 ’중음‘의 세계는 분명 우리와 함께 공존합니다. 반드시 죽어야 갈 수 있는 금단의 구역이 아니라 삶이라는 시간의 연속성 사이사이에 빈 틈새의 공간처럼 존재하는 곳입니다.
그 중음의 세계를 꿈이나 환각으로 처리해 버리면 배워야 할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그 세계는 우리가 삶의 공간에서 소홀히 해버린 무엇을 들어내는 곳입니다.
진실로 중요하지만 우리가 놓치고 있는 그것.
그래서 내면의 영혼이 보고 직면하라고 끊임없이 보여주는 진실의 창일지 모릅니다.
이 소설은 그 중음의 세계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 중음의 세계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던 주인공의 처절하고 아픈 사연은 차치하고 그가 중음의 세계에서 마침내 그것을 발견하고 빠져나오는 생생한 목격담을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