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든 왕들 , 깨어 있는 길〉 내면서
이 시집은 조선 왕릉을 보러 간 기록이 아니라, 그 길을 걸으며 시간을 건너온 흔적이다. 왕과 왕비들은 이미 잠들어 있고 능은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곳으로 이어지는 길은 지금도 조용히 사람을 부른다.
나는 그 부름에 응답하듯 숲길을 걷고, 돌을 밟고, 물이 흘러가는 방향과 바람의 결을 따라 시를 써 내려갔다. 왕릉은 죽음을 기리는 장소라기보다, 살아 있는 시간이 어떻게 쌓이고 사라지는지를 보여 주는 자리였다.
이 길에서 나는 왕이나 왕비의 업적을 노래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둘러싼 숲과 바람, 물과 돌, 햇빛과 그늘, 계절의 변화를 오래 바라보며, 중심이 아닌 곳에서 빛나는 시간들을 건져 올리고자 했다. 이름이 분명한 존재보다 기록되지 않은 시간, 중심보다 주변에 머무는 것들이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이 길에서 배웠다.
능에서는 기록으로 남은 기억을, 계절과 노동의 흔적을, 이름 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마주했다. 걷는다는 것은 바라보는 방식이 아니라, 스스로를 비워 내는 일이라 믿는다. 발걸음을 옮길수록 과거는 설명이 아니라 감각으로 다가왔다. 왕릉은 역사책 속 대상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풍경이 되었다.
걷는 시간 속에 늘 함께해 준 아내의 조용한 동행이 있었다. 자연 앞에 오래 머무는 그의 시간이 있었기에, 나는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이 기록을 백지 위에 옮길 수 있었다.
이 시집은 그 풍경 앞에 멈춰 선 한 사람의 기록이며, 세계문화유산이라는 이름 뒤에 놓인 시간의 결을 시로 옮긴 작은 시도다. 이 길을 함께 걷는 독자 또한, 잠든 왕들 곁에서 각자의 깨어 있는 시간을 마주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