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외국인 친구에게 '정(情)'을 설명하려 한 적이 있다. "It's like… affection?"
아니다. Affection은 선택이다. 정은 선택이 아니다. "Attachment, then?" 그것도 아니다.
Attachment에는 집착의 그림자가 있다. 정에는 없다.
다섯 단어를 꺼내고, 세 문장을 보태고, 두 가지 비유를 동원했다. 설명은 성공했다.
뜻은 전달됐다. 그런데 온도가 사라졌다. 한국어로 '정'이라고 말할 때 가슴에서 피어오르는
그 감각 - 다섯 단어와 세 문장 사이 어디에도 그것은 없었다.
번역이 실패하는 순간이 있다. 단어를 옮기지 못해서가 아니라, 단어에 압축된 감각을
풀어헤치는 순간 증발해버리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 '사라지는 것들'을 모았다. 95개의 한국어.
한(恨)의 깊이와 서운하다의 섬세함으로 시작해, 정과 눈치와 체면이 만드는 관계의 언어를
지나고, 밥심과 국밥과 치맥이 담긴 한국인의 밥상을 거치고, 아삭아삭과 보슬보슬이
그리는 소리의 세상을 듣고, 꽃샘추위와 가을 타다로 계절을 읽고, 존댓말과 우리가
입히는 말의 옷을 보고, 그냥과 대충과 팔자가 담긴 삶의 철학을 만나고, 시리다와 몸살로
몸이 기억하는 감각을 느끼고, 멋과 흥과 신명이 담긴 한국적 아름다움에 이르러,
한풀이에서 여행을 마친다.
한(恨)에서 시작해 한풀이에서 끝나는 여정. 사전처럼 찾아보고, 에세이처럼 읽는다.
매일 쓰면서 의식하지 못했던 한국어의 깊이를 재발견하는 책.
번역하면 사라지는 것들은, 느끼면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