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와서 쓰는 여행기는 언어의 신선함이 떨어진다. 다니면서 쓰는 노력을 안 해 본 건 아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길에서는 다음 일정 챙기기에 바빴고, 종일 걸어 돌아다닌 후 숙소에 오면 몸은 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어떤 날은 좀 길고 소상한 얘기를 쓸 수 있었지만, 많은 날의 기록은 메모에 의존했다. 그러다 보니 엉성하다.
숙소에서는 사진 정리와 장소 이름 메모 작업에 매달렸다. 일을 끝 내면 새벽 한 두시가 넘어 있는 날이 많았다. 그러나 여행기를 쓰는 지금 기억 되살리기에 가장 공헌하고 있는 것은 그날의 수고다.
나는 동선별로 사진 파일을 따로 만들었다. 두 달 치 여행 사진이 모두 한 파일에 있었다면 사진을 고르고 기억을 더듬느라 지금보다 몇 배의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고, 지구력 떨어지는 나는 곧 쓰기를 포기했을 것이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다닌 여행이라 다음 행선지를 위한 숙소 예약 등이 내겐 가능하지 않았다. 닥쳐서야 열차 시간표를 확인하고 차표를 구매하곤 했는데, 그 일도 매번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무엇보다도 무거운 짐가방을 끌고 다니는 일은 고역이었다.
여행만 다녀오면 여행기 한 권쯤 뚝딱 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여행 기는 몸을 쓰는 수고와 머리를 쓰는 번잡함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작업이다. 여행 기간보다 여행기 쓰기에 더 긴 시간이 걸린 이유다.
인터넷 등에서 취할 수 있는 정보는 굳이 찾아 쓰지 않았다. 친절함 이 떨어지는 글일 수 있지만, 이 여행기는 나의 관점과 감각에 집중하고 있다. 그것이 나의 독자들이 원하는 게 아닐까 해서다. 어느 책에 서든, 누구로부터든 들을 수 있는 얘기라면 굳이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없겠기에 말이다. 오롯한 나의 느낌을 일기 쓰듯 써 내려갔다.
이번 여행은 유랑극단처럼 욕심껏 많은 곳을 다녔다. 다음엔 한곳에서 그곳의 동식물, 곤충들, 사람의 섭생을 관찰하여 기록하고 싶다.
여행을 고민하는 당신이라면 그저 툭툭 떨고 떠나라. 고민하느라 꾸물대면 못 떠날 이유가 쌓여만 간다. 서울의 골목길과 리스본의 골목, 호카곶과 정동진은 다른 듯 닮았고 닮은 듯 다르다. 여행을 통해서만 이런 동질감과 이질감을 감각할 수 있다. 여행은 세포를 각성시켜 현재를 더욱 뜨겁게 이끄는 일이다.
『바람에 마음을 맡기다』는 내가 들렀던 도시 순서로 배열했지만, 그 도시 안에서는 내 방식대로 써 갔다. 가령 프라하에 일주일을 있었지만 있는 동안 다녀온 곳이 시간 순서로 들어 있지는 않다는 뜻이다. 그보다는 내가 알고 싶은 것 중심으로 주제별로 묶었다. 독자 여러분은 나의 루트보다 내가 무엇을 보았는지에 관심 가져 주면 좋겠다.
또 하나, 쉥겐국가만 다녔다는 점도 일러둔다. 쉥겐국가란 1985년 6월 14일, 유럽 내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하도록 룩셈부르크 쉥겐에서 체결된 쉥겐조약에 가입한 국가들을 말한다. 이 국경개방 조약에 현재까지 25개국이 가입되어 있다. 쉥겐국가 중 어느 나라를 통해 입국하든지, 최장 90일까지 쉥겐국가 내에서는 비자 없이 돌아다닐 수 있다. (한국 여권으로는 이런 경계가 의미가 없기는 하다)
안 쓰는 것보다 낫다는 믿음으로, 미흡한 채로 유럽 여행기를 마친 다. 기억이 희석되기 전에 서둘러 꺼내 둬야 했다는 점을 독자 여러분 이 이해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읽는 이는 너무 많은 걸 얻으려 생 각하지 말고, 준비 없이 떠난 길에서의 예기치 못했던 부대낌,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았던 여정, 그 속에서의 전진을 봐주기 바란다.
인생이 매 순간 그런 것처럼.
2025년 8월 익선동에서, 이성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