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안동약원기(安東藥院記,
안동安東에 있는 약원藥院에 관關한 기록記錄)
지정(至正) 정미년(丁未年) 1367년(年), 공민왕(恭愍王) 16년(年), 가을 9월(月)에, 경상도(慶尙道) 안동부(安東府)를, 맡아서 지킬 신하(臣下)들을 임명(任命)하였다.
부사(府使)에는, 현재(現在) 찬성사(贊成事)인 홍백정(洪柏亭)이, 의령군(宜寧君)에서 선발(選拔)되고, 판관(判官)에는, 전(前)에 장흥부사(長興府使)를 지냈던 정무(鄭袤)가, 감찰사규정(監察司糾正)에서 선발(選拔)되었는데, 입조(入朝)하여 하직인사(下直人事)를 드리고 나서, 함께 길을 떠났다.
그리하여 그해 겨울, 10월(月) 10일(日), 이른 아침에, 판관(判官)이 먼저 청사(廳事)에 도착(倒着)해서, 예(禮)를 행(行)하고, 대궐(大闕)을 향(向)하여 사은(謝恩)한 뒤에, 뜰에 내려가 부사(府使)를 영접(迎接)하니, 부사(府使)가 판관(判官)과 같이, 매우 근엄(謹嚴)하게 예(禮)를 행(行)하고 나서, 물러 나와 고을 관리(官吏)들에게서, 배알(拜謁)하는 예(禮)를 받았다.
이에 고을의 부로(父老)들이, 적임자(適任者)가 부임(赴任)하였다고 하면서, 서로 경하(慶賀)하였으므로, 어떤 명령(命令)을 내려도, 행(行)해지지 않는 바가 없게 되었다.
이듬해 봄 2월(月)에, 두 사람 공(公)이 이렇게 말하였다.
천기(天氣)가 이제 피어오르니, 만물(萬物)이 다시 생동(生動)하기 시작(始作)하는 계절(季節)이다.
따라서 계절(季節)의 일을 가지고서 상고(詳考)해 보더라도, 사람을 보살펴 주는 일이 중요(重要)하다고 할 것이니, 하시(何時)라도 불행(不幸)히 일찍 꺾이는 일이 없도록, 대비(對備)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혈기(血氣)가 제대로 유통(流通)되어, 태평성대(太平聖代)의 태화(太和)를, 보존(保存)하여 유지(維持)하게 해주려면, 의약(醫藥)의 공(功)을 베풀면서, 탕욕(湯浴)의 도움을 받도록 해야 할 것이니, 어찌 이 일을 먼저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서는 빈터를 물색(物色)해 보았으나,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하다가, 마침 법조(法曹)의 관아(官衙)가, 오래 전(前)에 허물어진 채, 빈터로 남아 있었으므로, 거기에다 건물(建物)을 세우고, 약원(藥院)이라고 명명(命名)하였으니, 이는, 그 건물(建物)의 여러 가지 기능(機能) 중(中)에서도, 약원(藥院)의 비중(比重)을, 감안(勘案)해서 대표적(代表的)으로 내세운 것이다.
그 건물(建物) 가운데, 동(東)쪽의 곁채 3칸은, 탕욕(湯浴)의 장소(場所)를 제공(提供)하기 위(爲)한 것이었고, 서(西)쪽의 곁채 3칸은, 약물(藥物)을 제공(提供)하기 위(爲)한 것이었으며, 중앙(中央)에서 내려다보듯이, 높다랗게 지어 놓은 건물(建物)은, 찾아오는 왕인(王人)으로서 사자(使者)들을 접대(接待)하기 위(爲)한 것이다.
그리하므로 빈객(賓客)들이, 동서(東西)로 여행(旅行)하다가도, 응급처치(應急處置)를 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 주후방(肘後方)으로서 휴대용(携帶用) 비상(非常) 구급약(救急藥)과 같은 것도, 이제는 더 이상(以上), 진귀(珍貴)하게 여길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이곳은, 지역적(地域的)으로 가장 멀리 떨어져 있고, 백성(百姓)들이 또한 순박(淳朴)하기 이를 데 없는데, 약(藥)을 조제(調劑)하여, 병(病)을 낫게 하는 방법(方法)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까닭에, 독(毒)한 기운(氣運)에 쏘이기라도 하면, 불행(不幸)하게 되는 일이, 항상(恒常) 일어나고 있으니, 더 이상(以上)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이러한 때에, 백정공(柏亭公)이, 위에서 제창(提唱)하고, 정판관(鄭判官)이, 아래에서 화답(和答)한 결과(結果), 힘은 절반(折半)만 들이고서도, 공(功)은 갑절이나 이루어서, 안동(安東)이 영원(永遠)토록, 그 덕(德)을 보게 되었으니, 이 일을, 어찌 기록(記錄)해 두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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