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고의 문장가 박지원은 44세에 처음 청나라 땅을 밟았다. 짐 가방에는 벼루, 거울, 공책 네 권만 챙겼다. 나머지 수행원들이 무역 짐을 쌌을 때, 이 사람은 공책을 쌌다. 그리고 돌아왔을 때, 그 공책은 26권이 되어 있었다.
열하일기는 250년 전 한 조선 지식인이 쓴 해외여행기다. 그런데 보통 여행기가 아니다. 참외밭 노인의 눈물에 속아 참외를 왕창 산 이야기, 몽골인의 모자를 뺏어 공차기를 한 마부 이야기, 밤마다 감시를 피해 북경 뒷골목을 헤맨 이야기, 서양 시계 앞에서 세계관이 흔들린 이야기, 마술 20개를 봤는데 하나도 못 풀었다고 솔직하게 적은 이야기까지. 빠뜨린 것이 없다. 적지 않아도 될 것까지 적었다. 그래서 26권이 됐다.
이 책은 열하일기 26권 가운데 가장 황당하고, 가장 웃기고, 가장 인간적인 장면 36개를 골랐다. 학술 번역이 아니라 원문의 맥락과 재미를 오늘의 독자 눈높이에 맞게 재구성한 큐레이션 에세이다. 고전을 요약하는 것이 아니라, 고전을 살아 있는 사람의 기록으로 되돌려 놓는다.
요동 벌판 앞에서 울고 싶었던 남자, 수레 없는 조선에 분노한 남자, 분뇨도 재화라고 읽어낸 남자. 그리고 정조가 반성문을 시켰더니 그 반성문마저 명문을 써낸 남자. 박지원을 처음 만나는 독자에게는 입문서로, 열하일기를 이미 아는 독자에게는 재발견의 기회로 읽힐 책이다. 부록으로 박지원 생애 연표, 열하일기 26권 구성 안내, 여행 경로 해설, 등장인물 소개를 수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