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사 크리스티, 『갈색 양복을 입은 남자』
모험을 꿈꾸던 한 여자가 있었다. 고고학자 아버지의 곁에서 단조롭기 그지없는 나날을 보내며, 도서관의 낡은 소설 속 '로디지아의 강인하고 과묵한 남자들'을 동경하던 앤 베딩펠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얼마 되지 않는 유산을 쥐고 런던으로 향한 그녀에게 모험은 생각보다 빨리, 그리고 생각보다 거칠게 찾아온다.
런던 지하철역에서 한 남자가 선로 위로 떨어져 목숨을 잃는 장면을 목격한 순간부터, 앤의 일상은 완전히 뒤집어진다. 의사를 자처하며 시신을 확인한 뒤 황급히 사라진 '갈색 양복을 입은 남자', 그가 떨어뜨린 수수께끼의 종이 한 조각. 경찰이 단순 사고로 치부한 이 죽음의 이면에 무언가가 숨어 있음을 직감한 앤은, 암호를 풀어가다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으로 향하는 배 '킬모든 캐슬'호에 올라타게 된다. 그곳에서 다이아몬드 밀매, 국제 범죄 조직, 그리고 '대령'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정체불명의 거물을 둘러싼 거대한 음모의 한복판에 빠져든다.
1924년에 발표된 이 소설은 아가사 크리스티의 네 번째 장편이자, 에르큘 푸아로나 미스 마플이 등장하지 않는 독립적인 모험 스릴러다. 크리스티가 1922년 첫 남편 아치볼드와 함께 떠난 대영제국 박람회 홍보 세계 일주 여행의 경험이 소설 곳곳에 녹아 있다. 케이프타운의 테이블 산, 로디지아의 광활한 대지, 잠베지강 유역의 밀림까지—크리스티가 직접 보고 느낀 아프리카의 풍경이 소설의 배경으로 생생하게 살아 숨 쉰다. 여행단의 단장이었던 벨처 소령의 유치하면서도 묘하게 중독성 있는 성격은 소설 속 유스터스 페들러 경이라는 희극적 캐릭터로 재탄생했고, 비밀정보국 요원 '커널 레이스'는 이 작품에서 처음 등장하여 이후 『나일강의 죽음』 등 세 편의 장편에 더 모습을 보이게 된다.
순수한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모험·스파이·로맨스가 뒤섞인 활극에 가깝다. 논리적 추론보다는 직감과 용기로 위험 속에 뛰어드는 앤의 캐릭터가 이야기를 이끌어가며, 앤의 1인칭 서술과 페들러 경의 일기가 번갈아 등장하는 이중 시점 구조는 같은 사건을 전혀 다른 온도로 바라보는 재미를 선사한다. 크리스티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지는 않지만, 서른두 살의 젊은 작가가 아프리카의 바람을 기억하며 써내려간 이 소설에는 모험과 위험, 미지의 세계를 향한 순수한 설렘이 가득하다. 추리소설의 여왕이 되기 전, 모험을 꿈꾸던 한 여성 작가의 가장 솔직한 초상이 바로 이 책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