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흘렀다. 세상은 내가 외면하는 사이에도 움직였다. AI 번역의 정밀도는 높아졌고, 번역 시장의 구조는 바뀌었으며, 살아남은 번역가들은 도구를 손에 쥔 번역가들이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지켜온 것이 '원칙'이 아니라 '습관'이었다는 것을. 그것도 이미 의미를 잃어가는 습관.
이 책은 그 20만원짜리 후회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끝은 거기서 멀리 간다. 번역가 한 사람의 이야기에서 출발해, AI가 바꾸고 있는 문명의 지형도를 함께 걸어보려 한다. 언어를 다루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이 전환의 시대를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 이 책이 나처럼 두려움을 자존심으로 포장해온 사람들에게 조금의 위로와 조금의 자극이 되었으면 한다.
한 가지만 먼저 말해두고 싶다. 나는 이 책에서 AI를 찬양하지 않는다. 동시에 AI를 두려워하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더 단순하다. 두려움 때문에 보지 않는 것들을 보기 시작하면, 세상이 달라진다. 가장 중요한 건 바로 그 깨달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