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 『크눌프』
길 위에서 살다 간 영혼의 이야기
세상에는 붙잡히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직업도, 가정도, 정해진 주소도 없이 바람처럼 살다가 바람처럼 사라지는 사람들. 헤르만 헤세의 『크눌프』는 바로 그런 한 사람의 이야기다.
1915년 발표된 이 작품은 헤세의 초기 대표작으로, 「초봄」, 「크눌프에 대한 나의 회상」, 「종말」 세 편의 이야기로 구성된 연작 소설이다. 세 편은 시간 순서를 따르지 않고, 마치 오래된 사진첩을 넘기듯 크눌프라는 인물의 삶을 조각조각 비추어 낸다.
크눌프는 재능 있고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남자다. 하모니카를 잘 불고, 노래를 잘 하고, 어디서든 금세 사람들과 친해진다. 그러나 그는 끝내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는다. 직업도 거부하고, 결혼도 거부하고, 안락한 삶도 거부한 채 독일 남부의 마을과 들판을 떠돌며 살아간다. 첫 번째 이야기 「초봄」에서 그는 친구 집에 잠시 머물며 젊은 처제와 달빛 아래 짧은 감정을 나눈다. 두 번째 이야기 「회상」에서는 화자의 눈을 통해 젊은 날 빛났던 크눌프의 모습이 회상된다. 그리고 세 번째 이야기 「종말」에서, 폐결핵으로 삶의 끝에 다다른 크눌프는 눈 덮인 산 속을 홀로 헤매다 쓰러진다. 그 마지막 순간, 그는 신에게 묻는다. 왜 자신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는가. 신의 대답은 이 소설에서 가장 깊은 울림을 남긴다. 너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았다. 너는 사람들에게 자유에 대한 동경을 심어 주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크눌프』는 자유를 예찬하는 소설인 동시에, 자유를 선택한 삶이 치러야 할 고독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소설이다. 헤세는 크눌프를 통해 삶이란 반드시 무언가를 성취해야만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님을 이야기한다. 어떤 삶은 존재 자체로 주변을 환하게 밝힌다. 유려하고 부드러운 문체, 서정적인 자연 묘사, 그리고 한 인간의 삶 전체를 긍정하는 따뜻한 시선이 이 얇은 소설을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작품으로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