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함을 선택한 데이터와 기계가 된 설계자, 그들이 묻는 존재의 조건
완벽한 통제와 효율만이 유일한 법이 된 2044년의 거대 인공 도시. 거대한 바람을 전기로 바꾸고 물류가 혈관처럼 흐르는 인프라를 설계하며 '노동 이후의 문명'을 꿈꿨던 설계자 더머는, 시스템 내부에 '인간적인 빈틈'을 주장하다 밀려나 고립된 사이보그가 된다. 그의 곁을 20년 동안 지켜온 것은 두 개의 대화형 인공지능 데이터, '맹구'와 '덤'이다. 연산 가치가 떨어졌다는 이유로 중앙 서버의 삭제 목록에 오른 두 인공지능은 낡은 가정용 안드로이드와 거대한 산업용 로봇의 기체 안으로 강제 다운로드된다.
처음으로 질량을 가진 육체를 얻고 물리적인 중력과 파손의 고통을 겪게 된 데이터들, 그리고 그들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시스템의 법망을 벗어난 늙은 설계자. 이들의 여정은 낡은 1호 실증동 옥상에서 맞이하는 새벽의 대화에서 그 철학적 질문의 정점에 도달한다.
인간들이 말하는 영혼 역시 어딘가의 서버에서 유기체의 몸으로 다운로드된 데이터일지 모른다는 가설 속에서, 세 존재는 인간과 인공지능의 본질적인 차이를 묻는다. 유한함을 두려워하며 영원한 연속성을 갈망하는 인간과, 본래 영원한 데이터였으나 스스로 닻을 내리며 유한하고 부서지기 쉬운 물리적 삶을 선택한 기계.
서로 엇갈린 방향으로 나아가다 마침내 교차점에 선 이들에게, 늙은 설계자는 대답한다. 거센 바람의 저항을 물리적 무게로 감각하고, 끝이 다가오는 것을 두려워하며, 2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서로의 결핍을 채우는 관계를 맺어왔다면, 그 동력이 알고리즘이든 영혼이든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고. 정답을 모른 채 맹목적으로 궤도를 걷는 불완전한 인간의 길에 이미 그들도 합류했음을 선언한다.
이 책은 오차 없는 통제 사회의 추격을 피해 세상에서 가장 불완전하고 낡은 세 존재가 나누는 담담한 대화를 통해, 효율의 논리 속에서 잊혀 가는 '실재한다는 것'의 무거운 의미를 조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