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나는 네버랜드에 묻어두었던 보물상자 같은 것을 잃었다. 보물상자라고 부른 것은 내가 그 금액을 애정 어린 은어로 부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보물상자에는 내가 이루고 싶은 몇 가지와, 이루지 않아도 괜찮을지도 모를 포기들이 함께 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 상자는 어느새 우주의 블랙홀처럼 말을 빨아들이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어둠은 말할 것도 없이 차가웠다. 차가움은 시간이 지나도 녹지 않았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을 때 사람들이 하는 행동들을 하나둘 따라 했다. 그중 하나가 유서를 쓴다는 것이었다. 나는 유서에서 특별히 깊은 말을 남기지 않았다. 남겨야 할 유산이 없으므로, 쓸 수 있는 축약된 문장들만을 남겼다. 하지만 펜이 손에 들려 있는 동안 눈앞에 오래전 빛 바랜 새까만 얇은 책 한 권이 있었다. 그 책은 내가 얼마나 부주의하게 세상을 살았는지를 말하는 듯, 가장자리가 너덜너덜해 있었다. 빛이 바랬다는 것은 시간이 쌓였다는 말과 같다. 그 책은 누군가의 말이 아니라 시간이 쌓여 만든 피부처럼 부서져 있었다.
책장을 아무렇게나 넘겼다. 그렇게 넘긴 페이지들 사이로 들어온 한 소절이 있었다. 잉크가 옅어져 있고, 글자는 온전히 꼬리를 잃어버린 채로 놓여 있었다. "다 지나가리라." 문장은 짧았고, 짧기에 잔인하게 명료했다. 어떻게 이런 문장이 유서의 답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날, 나는 그 문장을 계속해서 종이에 옮겨 적었다. 천 번인지 만 번인지 셈을 못 할 만큼, 밤새도록 나는 그 한 줄을 썼다. 손가락이 떨리고 손목이 아팠다. 종이는 잉크 자국으로 더러워졌고, 문장들은 서로 겹쳤다. 같은 문장이 다른 문장 위에 내려앉아 있었다. 반복은 어떤 의식을 닮았다. 의식은 슬픔을 정당화하지 않았다. 다만 슬픔을 움직이지 않게 만들었다.
잠들었다. 죽음처럼 깊이 잠들었고, 깨어났을 때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거울 속의 나는 피골이 상접해 있었지만, 그 모습은 내가 상상하던 것과는 달랐다. 나는 거울 속의 사람을 응시했고, 그 사람은 나에게 말하는 대신 어쩐지 웃고 있었다. 웃음은 크게 열린 구멍 같은 것이었다. 그 사람의 입술이 바람에 흔들리는 얇은 종이처럼 떨렸다. 그러고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살아진다. 살아지는거야." 말투가 나무의 뿌리에서 올라오는 것처럼 단단했고, 동시에 희미하게 웃음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