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안개(Black Fog)
남부의 태양과 생명력을 몸에 지닌 청년 보리스가 북부 수도 페테르부르크에 올라와 성공을 꿈꾸지만, 도시의 냉기와 습기, 병든 공기와 검은 안개에 육체와 영혼을 잠식당한 끝에 고향 폴타바현으로 돌아가 죽음을 맞는 비극적 회상 서사다.
일인칭 서술자인 나, 곧 보리스가 임종 전 사셴카라고 부르는 인물이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시작된다. 서술자는 보리스가 처음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던 날을 선명히 기억한다. 보리스는 ‘뜨겁고 나른하며 관능적인 남부’에서 올라온 청년이며, 그에게서는 검은 흙의 힘, 햇볕에 마른 초원의 냄새, 체리나무 뒤로 사라지는 남부의 조용한 석양 같은 기운이 풍긴다. 그는 단순한 방문객이 아니라, 남부의 대지와 태양, 육체적 건강이 한꺼번에 사람의 형상으로 들어온 듯한 존재다.
작품은 러시아 제국 말기, 근대 도시 문명이 확대되던 시기의 페테르부르크와 남부·우크라이나 지역이다. 철도, 공공도서관, 신문 기사, 기술 기사, 대형 식당, 하숙집, 고급 마차, 오페라와 경가극, 성가대 등은 모두 근대 도시와 근대 산업 사회의 현실감을 형성한다.
이 시대는 지방 청년이 수도로 올라와 사회적 성공을 꿈꿀 수 있는 시기이지만, 동시에 수도의 관료제, 산업 체계, 도시 소비문화, 유흥장, 계층적 공간이 인간을 소모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보리스가 철도 업무에서 인정받는 것은 근대적 합리성과 자기 계발의 성공을 뜻하지만, 그의 육체와 영혼이 검은 안개에 무너지는 것은 그러한 성공이 인간의 생명 전체를 구하지 못함을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