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어느 날이었다. 책상 위에 한 권의 책이 놓여 있었다. 팀 잉골드의 『선의 인류학』. 표지의 흰 바탕에 가느다란 선들이 그어져 있었다. 그 선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딘가에서 출발해 어딘가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그 무렵 나는 여수의 작은 서재에서 번역 일을 하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겨울 바다가 보였고, 모니터에는 영어 원문과 한국어 번역본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언제나처럼 하루의 대부분을 문장과 문장 사이의 거리를 재며 보내던 시기였다.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옮겨가는 일. 한 단어에서 다른 단어로 건너가는 일. 그것은 어쩌면 내가 평생 해온 일의 가장 작은 단위인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