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오쯔은 주관이 분명하고 정의에 불타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일본의 침략과 소련의 만행, 중국의 공산화와 그 폐해에 결연히 항거한 불굴의 사나이였다. 작은 키에 성질이 거칠고 화를 잘 내는 돌출성 때문에 남과의 충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용기가 있었기에 학력도 없고 가난하며 키도 작은 그가 원고를 투고할 수 있었고, 샤오홍 같은 반려자를 만날 수 있었으며, 루쉰을 감히 찾아갈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한 세대를 풍미하는 작가가 된 것이다. 1934년 말에 좌련에 가입할 뜻을 지녔던 샤오ㅉ은 루쉰의 애정에 찬 만류에 가입하지 않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반공대열에 서서 처절한 수난을 당하게 되었다. 의리가 있는 샤오ㅉ은 끝가지 루쉰의 은혜를 잊지 않았으며, 루쉰의 쪼우양과 관계가 악화되었을 때에도 항상 루쉰의 편에 서 있었다. 그는 사해에서 "제삼대"를 발표하였는데, 이 작품은 항일투쟁을 고무하는 강렬한 필체로 씌어졌다. 1942년 연안 문예강화 이후에 마오쩌둥은 "들백합화"의 작가인 왕스웨이를 공격하면서 비협조적인 작가들인 띵링, 샤오쯔, 아이칭 등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샤오ㅉ은 공산당의 허구성을 폭로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동지의 사랑과 인내를 논함"("해방일보" 부간)에서 "동지간의 우애는 날로 박해진다. ...이젠 혁명도 싫증난다."라고 하면서 반기를 들어서 정치와 문예의 개별화를 시종 주장하였다. 결국 그는 연안 문예강화를 수용하지 않았는데, 루쉰의 제자라는 사실 때문에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투지는 식지 않았고 더욱 거세어만 갔다. 단편소설인 "광란의 파도"와 "잠시 동안의 이별"은 모두 작가의 도전적이며 불굴의 의지가 짙게 서려 있어 일종의 고발 의식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는 1948년에 쓴 "신년헌사"에서 "민주다, 혁명이다, 공산이다 하는 것이 다 하늘을 저버리고 사람을 배반하며 인륜을 엎어 버리는 행위이다. ...청나라 같은 이민족이나 일본 같은 왜놈도 이러하지 않았다. 왜 공산당이 이렇게 비인간적인 행위를 하는가?"라고 신랄하게 비판을 가하였다.
샤오ㅉ은 30년 가까이 북경에 숨어 지내면서 문화혁명 때에는 8년이나 노동을 하기도 하다가 1978년에 복권되어 문단에 다시 나타났다. 여기에 실린 두 편의 작품에는 작가의 일관된 반체제 의식이 담겨져 있다. 샤오ㅉ은 평생 동안 갖은 고난과 시련을 바탕으로 자신의 의지를 표현했는데, 이렇듯 승리를 위한 고통을 독자와 함께 나누고자 하는 면에서 그 어느 작가의 추종도 불허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