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비 내리는 어느 잿빛 오후, 향토사·고고학 동호회 회원들이 낡은 박물관에 발이 묶인다. 어룡의 화석과 박제된 새들, 로마 병사의 빛바랜 두개골에 둘러싸인 채, 그들은 난롯가에 둘러앉아 하나둘 옛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한다 — 한때 이 웨식스 땅을 살다 간, 고귀한 여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백작의 딸과 후작부인, 공작부인, 그리고 이름 없는 시골 처녀까지. 강요된 혼인과 신분의 벽, 흔들리는 사랑과 모성, 끝내 떨치지 못한 자존심과 뒤늦은 회한 — 영국 문학의 거장 토머스 하디는 향토사 책장의 메마른 족보와 빛바랜 날짜들 사이에서, 숨죽이고 있던 열 편의 드라마를 길어 올린다. 그렇게 되살아난 여인들의 초상은, 화려한 작위 뒤에 가려져 있던 가장 인간적인 격정과 비애를 고요히 드러낸다.
하디 특유의 서늘한 아이러니와 따뜻한 연민으로 그려 낸 열 개의 초상. “고귀한 여인들의 초상”은 신분과 운명에 갇힌 여인들의 삶을, 그리고 그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우리 자신을 함께 비추는 한 권의 작은 갤러리다.
본문 중에서
애정에 참된 용기가 있었더라면 첫 결혼을 떳떳이 밝히고 그를 제 아들로 길렀을 것을! 그토록 고귀하고 훌륭한 아들의 사랑과 보살핌을 얻는 것에 견주면, 이 진주와 금잎으로 된 값진 작은 관(冠)을 끝내 얻지 못했다 한들 그게 무슨 대수였겠습니까? (……) 그리하여 그녀는, 첫 남편과 혼인한 그 어리석은 열정을 뉘우쳤던 것보다도 더 쓰라리게, 그 남편을 부인(否認)했던 제 오만을 뉘우쳤습니다.
— 「스톤헨지 후작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