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을 마주한 자들 — 허먼 멜빌 단편선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모비 딕』의 작가 허먼 멜빌이 남긴 단편의 정수를 한 권에 담았다. 표제작 「필경사 바틀비」를 비롯해 「베니토 세레노」, 「피아자」, 「피뢰침 장수」, 「엔칸타다스」, 「종탑」까지, 1850년대 멜빌이 잡지에 발표하고 한 권으로 묶었던 여섯 편을 새로 옮겼다. 거대한 고래를 쫓던 작가가 이번에는 한 변호사의 사무실, 한 척의 노예선, 폭풍우 치는 시골집, 화산섬의 군도, 르네상스의 종탑이라는 좁은 무대로 우리를 데려간다. 무대가 좁아진 만큼, 빛은 더 날카롭게 한 점에 모인다.
월스트리트의 어느 필경사는 어느 날부터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한마디로 모든 명령을 비껴간다. 거부도 항의도 아닌 이 나직한 한마디가 어떻게 한 사람의 세계를 송두리째 흔드는지, 「필경사 바틀비」는 보여 준다. 카프카와 카뮈가, 그리고 무수한 철학자들이 이 창백한 인물의 그림자 아래에서 태어났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노예선 위에서 진실을 보면서도 끝내 읽어 내지 못하는 선량한 선장의 이야기 「베니토 세레노」는, 선의가 어떻게 맹목이 되는지를 노예제라는 미국의 원죄와 함께 응시한다. 멀리서 빛나던 행복의 창이 가까이 가면 스러지는 「피아자」, 천둥의 공포를 팔러 다니는 외판원을 그린 서늘한 우화 「피뢰침 장수」, 갈라파고스의 잿빛 화산섬에서 인간의 비참과 존엄을 함께 길어 올린 연작 「엔칸타다스」, 그리고 제가 만든 기계에 도리어 죽임당하는 오만한 장인의 「종탑」까지—여섯 편은 저마다 다른 무대에서 같은 심연을 들여다본다.
이 작품들이 쓰인 1850년대는, 『모비 딕』과 『피에르』가 잇따라 외면당하며 멜빌이 작가로서 가장 깊은 골짜기에 들어선 시기였다. 빚은 늘고 건강은 무너졌으며, 세상은 더는 그의 큰 배를 띄워 주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작은 보트들을 모아 내보냈다. 그러나 이 작은 보트들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인간은 타인의 영혼을, 세계의 진상을, 제 손으로 만든 것의 결말을 끝내 알 수 있는가—멜빌이 평생 붙들었던 물음이 여기 가장 날카롭게 벼려져 있다.
멜빌은 이 물음에 선뜻 답을 주지 않는다. 바틀비의 속내는 끝내 봉인되고, 선장의 눈은 진실을 비껴가며, 거북은 가망 없이 바위에 부딪히기를 거듭하고, 모든 빈칸은 메워지지 않은 채 남는다. 오히려 그 메울 수 없음이야말로 그가 그리려 한 진실이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결코 차갑지 않다. 바틀비를 끝내 외면하지 못한 변호사의 안타까움, 외딴섬에 홀로 남겨진 과부의 슬픔 앞에 피 흘리는 모든 가슴—멜빌은 알 수 없음의 심연을 응시하면서도, 그 가장자리에 선 인간을 향한 연민의 끈을 끝내 놓지 않는다.
멜빌의 문장은 라틴어풍의 장중한 만연체에서 사무실의 가벼운 희극으로, 다시 깊은 비가(悲歌)로 미끄러진다. 성서와 고전, 셰익스피어와 스펜서의 울림을 품은 그 문체는, 짧은 이야기 안에 장편 한 권의 무게를 응축한다. 이번 번역은 그 호흡과 격조를 살리되 직역의 어색함을 덜어, 오늘의 독자가 멜빌의 목소리를 자연스럽게 따라 읽도록 했다.
발표 당시 외면당한 채 잊혔던 멜빌은, 세상을 떠난 뒤에야 19세기 미국 문학의 정점으로 다시 떠올랐다. 한 세기 반이 지난 지금도 독자를 먼바다로 실어 나르는 그의 단편 세계로, 이 책이 안내한다. 벽을 마주한 자들의 이야기는, 결국 그 벽 앞에 선 우리 자신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죽은 벽을 마주한 채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나직이 되뇌던 한 필경사의 목소리가, 가장 오래 우리 귓가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