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있다. 누구도 가난하지 않고, 누구도 외롭지 않으며, 늙음도 병도 죽음의 두려움도 없다. 괴로운 일이 생기면 소마라는 알약 한 알이 곧장 마음의 평화를 돌려준다. 사람은 더 이상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지 않고 공장의 병 속에서 길러지며, 태어나기 전부터 제 계급에 꼭 맞게 설계되어, 제게 주어진 삶을 사랑하도록 길들여진다. 불만도 반항도 없는, 완벽하게 안정된 사회. 이것이 올더스 헉슬리가 1932년에 내놓은 미래의 풍경이다.
『멋진 신세계』의 무서움은 폭력이나 억압에 있지 않다. 이 세계의 사람들은 채찍에 맞아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복종을 행복으로 여기도록 만들어진다. 책을 금지할 필요도 없다. 아무도 책을 읽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실을 감출 필요도 없다. 쾌락이 너무 흔해서 누구도 진실을 아쉬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헉슬리는 인류가 꿈꾸어 온 유토피아의 얼굴을 가만히 뒤집어, 그것이 실은 어떤 감옥일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이 매끄러운 세계에 균열을 내는 것은 그 질서에 들어맞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문명 바깥에서 자라난 청년 '야만인 존'이 있다. 셰익스피어의 언어로 사랑과 고통과 죽음을 배운 그에게, 이 신세계는 처음엔 눈부신 곳이었다. 그러나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그 눈부심은 텅 빈 광채로 드러난다. 존은 끝내 묻는다. 괴로움이 사라진 삶은 과연 살 만한 삶인가. 안락을 위해 인간은 무엇까지 내어줄 수 있는가. 그가 세계를 다스리는 통제관과 벌이는 논쟁은 이 소설의 심장이며, 어느 한쪽도 쉽게 손들어 줄 수 없는 팽팽한 질문으로 독자를 몰아세운다.
조지 오웰의 『1984』가 고통으로 인간을 짓누르는 권력을 두려워했다면, 헉슬리는 정반대를 내다보았다. 쾌락과 편리가 인간에게서 스스로 생각할 힘을 앗아 가는 세계 말이다. 끝없이 흘러나오는 오락, 손쉬운 위안을 주는 약, 불편함을 견디기보다 지워 버리려는 충동을 떠올려 보면, 거의 한 세기 전에 쓰인 이 소설이 어째서 지금 더 날카롭게 읽히는지 알 수 있다.
『멋진 신세계』는 답을 주지 않는다. 다만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이 효율과 만족이 아니라, 어쩌면 견디고 갈망하고 끝내 슬퍼할 줄 아는 능력은 아닌지를 묻는다. 한 번 그 질문을 받아 든 독자는, 책을 덮은 뒤에도 그것을 쉬이 내려놓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