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뚝의 비밀』
추리소설의 여왕 아가사 크리스티가 작가 생활 초기에 써낸 경쾌한 모험 스릴러. 회색 뇌세포의 푸아로도, 시골 마을의 미스 마플도 없다. 대신 거짓 이름과 위장, 국제적 음모와 보석 도둑, 그리고 톡톡 튀는 입담이 책장을 쉼 없이 넘기게 만든다.
아프리카를 떠돌던 청년 앤서니 케이드는 옛 친구에게서 사소해 보이는 심부름 둘을 떠맡는다. 죽은 정치가의 회고록 원고를 런던에 전하는 일, 그리고 한 부인에게 협박 편지를 돌려주는 일. 그러나 이 별것 아닌 부탁이 그를 발칸의 가공 왕국 '헤르초슬로바키아'를 둘러싼 거대한 음모의 한복판으로 끌고 간다.
무대는 곧 영국의 유서 깊은 대저택 '침니스'로 옮겨진다. 왕정복고와 석유 이권을 놓고 비밀 회동이 열린 바로 그곳에서, 왕위 계승자가 총에 맞아 죽은 채 발견된다. 스코틀랜드 야드의 배틀 경정, 프랑스에서 온 형사, 미국에서 건너온 수수께끼의 손님이 차례로 모여들고, 사라진 회고록과 행방이 묘연한 전설의 보석, 어디에나 그림자를 드리우는 천재 도둑 '킹 빅토르'의 정체가 얽히고설킨다. 여기에 매력적인 미망인 버지니아와 앤서니 사이에 피어나는 로맨스가 더해지면서, 이야기는 한순간도 숨 고를 틈을 주지 않는다.
이 작품의 진짜 묘미는 마지막 장에 응축된 연쇄 반전에 있다. 거짓 이름 뒤에 또 다른 거짓 이름이, 위장 뒤에 또 다른 위장이 숨어 있어, 책을 덮을 때쯤이면 누가 누구였는지 처음부터 다시 짚어 보게 된다. 정교한 트릭으로 머리를 싸매기보다, 속도와 유머와 반전에 기꺼이 휘말리며 단숨에 읽어 내려가는 즐거움. 명탐정의 그늘에 가려 잘 보이지 않던, 천생 이야기꾼이었던 또 하나의 크리스티를 만나는 시간이다.
한 세기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좋은 이야기가 주는 즐거움은 늙지 않는다. 가볍게 펼쳐 끝까지 유쾌하게 즐길 수 있는, 크리스티 입문작으로도 더없이 좋은 한 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