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 아저씨의 오두막』은 한 권의 소설이 어떻게 한 시대의 양심을 뒤흔들고, 끝내 한 나라의 역사를 바꿀 수 있는지를 증명한 책이다. 1852년 미국에서 출간되자마자 첫해에만 미국에서 30만 부, 영국에서 100만 부가 넘게 팔려 나갔다. 성경을 제외하면 19세기에 가장 많이 읽힌 책이라는 평가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러나 이 책의 진짜 힘은 판매 부수에 있지 않다. 노예제를 멀리 남부의 추상적인 제도로만 여기던 평범한 사람들의 가슴에, 그것이 곧 자기 이웃의 고통임을 깊이 새겨 넣은 데 있다. 훗날 링컨이 작가를 만나 "이 큰 전쟁을 일으킨 작은 부인"이라 불렀다는 일화는, 이 작품이 남북전쟁으로 이어지는 길을 닦았다는 평가와 함께 오래도록 전해진다.
이야기는 켄터키의 한 농장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흐른다. 한 줄기는 아래로 향한다. 빚에 몰린 주인에게 팔려, 켄터키에서 뉴올리언스로, 다시 레드강 깊은 농장으로 끝없이 팔려 내려가는 정직하고 충직한 톰의 하강이다. 그 길에서 톰은 천사 같은 소녀 에바를 만나 잠시 빛 가운데 머물지만, 끝내 사이먼 리그리라는 악마의 손에 떨어져 매질 아래 순교한다. 또 한 줄기는 위로 솟는다. 어린 아들을 빼앗기지 않으려 깨어지는 얼음장을 밟고 강을 건너, 자유를 향해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일라이자와 조지 부부의 탈출이다. 한 사람은 끝내 굴종 속에 죽고, 다른 가족은 사슬을 끊고 솟아오른다. 작가는 이 상반된 두 운명을 나란히 놓아, 인간을 물건으로 셈하는 제도가 어머니와 자식을, 남편과 아내를 어떻게 갈라놓는지를 두 방향에서 동시에 비춘다.
이 소설이 오래 살아남은 것은 무엇보다 인물의 힘이다. 폭력 앞에서도 끝내 자신을 죽이는 자까지 용서하는 톰, 인종도 신분도 가리지 않는 순결한 사랑으로 어른들의 위선을 비추는 어린 에바, 노예제의 부당함을 누구보다 또렷이 알면서도 끝내 행동하지 못하는 회의주의자 세인트클레어, 사랑을 받아 본 적 없어 망가졌다가 끝내 회복되는 소녀 톱시, 그리고 절망의 가장자리에서 책략으로 자유를 쟁취하는 캐시—한 번 만나면 잊히지 않는 인물들이 독자의 손을 잡고 노예제의 한복판으로 데려간다. 가장 잔혹한 악당 리그리조차 단순한 괴물이 아니라, 꺼지지 않는 양심의 목소리에 시달리는 한 인간으로 그려진다.
신시내티에서 18년을 살며 강 건너 노예주의 비극을 직접 목격한 해리엇 비처 스토는, 통계와 논쟁이 하지 못한 일을 한 편의 이야기로 해냈다. 그녀가 노예제를 고발하는 방식은 차가운 정치 논설이 아니라 사람의 얼굴과 목소리, 그리고 어머니의 눈물이었다. 자식을 빼앗긴 어머니의 찢어지는 슬픔에 호소함으로써, 그녀는 노예제를 누구도 외면할 수 없는 사적인 고통으로 바꾸어 놓았다.
물론 이 작품은 그 시대의 한계도 함께 안고 있다. 흑인을 지나치게 순종적인 존재로 그렸다는 비판이나, 자유를 얻은 이들을 아프리카로 돌려보내는 결말은 오늘의 독자가 진지하게 곱씹을 대목이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을 소유하는 일의 근본적인 죄악을 누구보다 또렷이 고발한 이 소설의 빛은, 한 세기 반이 지난 지금도 조금도 바래지 않는다. 약한 자의 말이 지워지는 일, 옳음을 알면서도 침묵하는 일은 형태를 바꾸어 여전히 우리 곁에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게 어떤 것인가"라는 톰의 마지막 물음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똑같이 양심의 문을 두드린다. 세상을 바꾼 한 권의 고전을, 이제 우리말로 온전히 만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