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년동안
천 년을 지켜본 여우가 말했다.
"그것이 깨어나고 있다"고.
우리가 역사라 부르던 것은, 그것의 숨결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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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과거에 세 번 낙방한 선비 최항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지막 도박처럼, 천 년 묵은 여우를 잡으면 신선이 된다는 소문 하나를 붙잡고 전라도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새소리가 끊긴 숲이었다.
벌레도 짐승도 없는 고요 속을 반나절 넘게 걸었다.
숲 끝에 나타난 것은 폐사 월정암.
백 년 전 승려들이 하룻밤 사이에 사라진 절이었다.
이끼가 부처의 얼굴을 절반쯤 삼키고, 숲이 기와지붕 위로 뻗어 내린 그 절의 마당 한가운데, 여인이 앉아 있었다.
칼을 뽑아 든 최항에게 여인은 바닥 없는 눈동자를 돌렸다.
들여다볼수록 깊어지는, 우물 같은 눈이었다.
여인은 말했다.
"죽여도 좋다.
다만 그 전에, 네가 무엇을 모르는지 말해주마."
어느새 대웅전 마루에 마주 앉은 최항에게 여인은 찻잔을 건네며 말했다.
인간은 너무 짧게 살아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고.
왕조의 흥망이 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이유를 인간은 묻지 않는다고.
"무언가가 숨을 쉬고 있어.
인류 전체가 그것의 일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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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다의 손짓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로 부르는 바다, 그 노래에 응답하면 돌아올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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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비늘 마을에 사는 열두 살 소녀 순이는 석 달 전 오빠를 바다에서 잃었다.
시신도 없이, 바다가 통째로 삼켜버렸다.
어머니는 병들어 누웠고, 순이는 울지도 못한 채 홀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보름달이 뜬 밤, 잠들지 못해 바닷가로 나간 순이의 귀에 뱃노래가 스며들었다.
오빠만 넣던 추임새, 오빠만 부르던 가사.
바다 위에는 손을 흔드는 형상이 떠 있었다.
마을 최고령 노파 복례 할머니는 경고했다.
물에 빠진 사람들이 변해서 가족을 부르는 거라고.
따라가면 돌아올 수 없다고.
오빠와 같은 배를 탔던 만득이 아저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날을 증언했다.
용팔이가 물 위의 무언가를 보며 스스로 걸어 들어갔다고.
마지막에 웃고 있었다고.
노랫소리는 밤마다 이어졌다.
갯바위 위에는 조개껍데기로 쓴 두 글자가 나타났다.
"순아."
파도가 밀려와도 지워지지 않았다.
귀를 막아도 노래는 들렸다.
바다가 순이를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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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신의 축복
삼신할머니가 주신 축복, 그 안에 심어진 것은 생명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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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굿골에서는 아이가 귀했다.
열다섯 해를 기다린 순덕은 삼신당에 엎드려 빌었고, 사흘 밤의 진통 끝에 아이를 얻었다.
산파는 웃고, 시어머니는 울고, 아이는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아이가 세상에 나오는 그 순간, 순덕의 가슴 한가운데에서 무언가가 함께 빠져나갔다.
따뜻함이 사라진 자리를 구멍 같은 한기가 채웠다.
시어머니는 첫젖과 탯줄을 삼신당에 바쳤고, 다음 날 아침 그것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삼신할머니가 다 가져가신 거제."
축복의 증거라 했다.
보름이 지나도 가슴의 빈자리는 채워지지 않았다.
마을 어머니들에게 물었다.
모두가 "처음엔 좀 그랬다"고만 하고 입을 다물었다.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막덕 할머니만이 말했다.
"삼신할머니가 주시는 게 공짜라고 생각했느냐.
네 살점이 아이한테 갔고, 거기 덧붙여 삼신할머니 것도 들어간 거야."
무엇이 들어간 것인지 묻자, 할머니는 입을 닫았다.
"그건 네가 알아야 할 것이 아니여.
그냥 아이를 잘 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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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뚝딱의 대가
굶어 죽는 가족을 살리기 위해 방망이를 두드릴 때마다, 자신과 가족의 존재를 한 조각씩 잃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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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겨울, 빈골에는 까마귀도 오지 않았다.
돌아는 병든 어머니와 어린 동생 셋을 먹여 살릴 방법이 없었다.
품삯을 줄 곳도, 벨 나무도,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겨울이었다.
어느 날 밤, 마을 사람 누구도 가지 않는 폐가 '방망이터'의 썩은 마루 아래에서 이름 붙일 수 없는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루판을 뜯자 기이한 무늬가 새겨진 방망이가 나왔다.
"뚝딱, 쌀 나와라."
방망이를 두드리자 맨땅 위에 쌀 한 되가 나타났다.
안에서부터 차가운 쌀이었다.
어머니가 피를 토하자 약재를 불렀고, 아궁이가 식자 땔감을 불렀다.
방망이는 부르는 것을 무엇이든 내놓았다.
그런데 두드릴 때마다 어지러움이 찾아왔고, 어지러움이 물러갈 때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함께 빠져나갔다.
돌아의 얼굴은 물동이에 비칠 때마다 윤곽이 흐려지고 있었고, 둘째 동생의 얼굴은 눈앞에 있는데도 초점이 자꾸 미끄러졌다.
풍요에는 값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