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언제나 질병과 함께 살아왔다. 그러나 질병은 늘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어떤 질병은 한 시대를 지배하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어떤 질병은 오랫동안 숨어 있다 가 어느 날 갑자기 역사의 전면으로 등장하였다. 또 어떤 질병은 인간의 몸보다 인간의 마음 을 먼저 병들게 하였고, 어떤 질병은 전쟁보다 더 많은 생명을 앗아가며 문명의 방향을 바꾸 어 놓았다.
우리는 흔히 역사를 왕과 장군, 전쟁과 혁명, 제도와 사상의 역사로 기억한다. 그러나 역사의 또 다른 주인공은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병든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어느 시대에는 나병환자 로 불렸고, 어느 시대에는 페스트 환자로 불렸으며, 또 어느 시대에는 천연두와 매독의 희생 자로 기록되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으로 남지만 질병은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찾아왔다. 왕의 침실과 농부의 오두막을 가리지 않았고, 교회의 제단과 시장의 골목을 구별하지 않았다. 질병은 언제나 인간 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이 책은 그러한 질병의 역사 가운데서도 유럽이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가장 격렬한 시기 를 다루고 있다.
흑사병은 끝났지만 역병은 끝나지 않았다. 14세기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쓸어버린 흑사병 이 지나간 뒤 사람들은 이제 재앙이 끝났다고 믿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인간의 희 망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도시는 더욱 커졌고 무역은 더욱 활발해졌다. 사람들은 더 먼 곳으로 이동하였고 더 많은 물건을 교환하였다. 전쟁은 계속되었으며 기근은 반복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틈을 따라 새로운 질병들이 등장하였다.
제1장과 제2장에서 만나는 발한병은 오늘날에도 정체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수수께끼 같 은 질병이다. 아침에 멀쩡하던 사람이 저녁에 죽고, 어제까지 웃고 떠들던 젊은이가 다음 날 시신이 되어 발견되었다. 사람들은 그 병을 이해하지 못했고 설명할 수도 없었다.
제3장의 발진티푸스는 전쟁이 만들어 낸 질병이었다. 군대가 지나간 자리마다 굶주림과 추위 가 뒤따랐고, 기근과 불결함은 다시 질병을 불러왔다. 전쟁은 칼과 총으로만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오히려 병이 더 많은 생명을 앗아갔다.
제4장의 프랑스병, 곧 매독은 또 다른 의미에서 인간 사회를 뒤흔들었다. 질병은 처음부터 의학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도덕의 문제였고, 종교의 문제였으며, 정치의 문제였다. 사 람들은 그 병의 책임을 서로에게 돌렸다. 프랑스인은 이탈리아인을 탓했고, 이탈리아인은 프 랑스인을 탓했으며, 스페인인은 신대륙을 탓하였다. 질병이 창궐할 때 인간은 언제나 원인을 찾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원인을 종종 자기 밖에서 찾는다. 그 모습은 500년이 지난 오늘 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제5장의 천연두와 홍역은 더욱 흥미롭다. 오늘날 우리는 천연두를 이미 사라진 질병으로 기 억한다. 그러나 수백 년 동안 천연두는 인류가 가장 두려워한 질병 가운데 하나였다. 어린아 이의 얼굴을 바꾸어 놓고 왕가의 계승자를 앗아가며 도시 전체를 공포에 빠뜨렸다.
그런데 찰스 크레이턴은 천연두가 언제부터 인간 사회의 중심적인 질병이 되었는지를 집요하 게 추적한다. 그는 당연하게 여겨지던 통념을 의심한다.
과연 천연두는 언제부터 존재했는가.
우리가 알고 있는 천연두는 과거에도 같은 모습이었는가.
질병 역시 역사 속에서 변화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그는 보여준다.
이 책의 저자 찰스 크레이턴은 현대 세균학이 등장하기 직전 세대의 학자였다. 따라서 그의 설명 가운데에는 오늘날의 의학적 지식과 다른 부분도 적지 않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 에 그의 책은 더욱 가치가 있다. 그는 병원 실험실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질병을 찾았다. 왕 실의 편지와 수도원의 기록, 시인의 문장과 지방 행정문서를 뒤지며 질병이 인간 사회 속에 서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를 추적하였다. 그의 관심은 병원체가 아니라 인간이었다.
어떻게 두려워했는가. 어떻게 설명했는가. 어떻게 기억했는가.
그것이 이 책의 진정한 주제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경험한 우리는 이제 안다.
감염병은 단순한 의학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병은 인간의 몸속에서 시작되지만 사회 전체 를 흔든다. 도시를 멈추게 하고 학교를 닫게 하며 경제를 위축시킨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 들의 생각을 바꾸어 놓는다. 질병이 지나간 뒤 세상은 이전과 같지 않다.
흑사병 이후의 유럽이 그랬고, 발한병과 매독 이후의 유럽이 그랬으며, 천연두가 남긴 상처 또한 그러하였다. 어쩌면 인류의 문명은 질병과 싸우며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 책을 번역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책은 죽음의 기록이 아니다. 이 책은 인간이 질병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기록이며, 두려움 을 견디며 살아남은 사람들의 기록이다. 질병은 사라져도 기억은 남는다. 그리고 그 기억은 다음 시대를 살아갈 사람들에게 길을 보여준다.
독자 여러분이 이 책을 통하여 단순히 과거의 감염병을 읽는 데 그치지 않고, 질병과 인간, 그리고 문명 사이의 깊은 관계를 함께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2026년 여름
노다은 · 노다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