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문을 두드리기보다 어느 날 문득 우리 안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야 나뭇잎의 떨림을 알아차리듯, 우리는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한 사람이 마음속에 남긴 온기를 발견합니다. 그 흔적은 오래된 편지의 잉크처럼 조금씩 옅어지기도 하지만, 이상하게도 사라질수록 더 선명해지는 빛을 품습니다. 이 시집은 바로 그 빛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는 마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누군가는 사랑을 만남이라고 말합니다. 누군가는 이별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삶은 그 둘 사이에 놓인 수많은 계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꽃이 피는 날보다 꽃잎이 흩날리는 날이 더 오래 기억되는 이유도, 우리의 마음이 아름다움보다 여운을 오래 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사랑은 손을 맞잡던 순간보다 손끝에서 온기가 사라진 뒤에 더욱 깊어집니다. 그리움은 멀어진 거리를 재는 감정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 인해 넓어진 마음의 깊이를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시간입니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사랑을 붙잡으려 하지 않습니다. 떠난 것을 억지로 되돌리려 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조용히 바라봅니다. 새벽 창가에 머무는 엷은 빛처럼, 빗물이 지나간 골목에 남아 있는 투명한 냄새처럼, 오래 신은 신발이 발의 모양을 닮아 가듯, 사랑이 지나간 자리마다 삶은 조금씩 새로운 결을 만들어 갑니다. 상실은 비어 있는 공간만 남기지 않습니다. 그 빈자리에는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숨결이 드나들고, 더 넓어진 침묵이 머물며, 조금 더 깊어진 사람이 서 있게 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흔적을 남기고 또 흔적을 품습니다. 말하지 못한 인사, 끝내 건네지 못한 편지, 미처 닿지 못한 손길, 뒤늦게 떠오르는 미소 하나까지도 모두 시간이라는 강가에 조용히 내려앉습니다. 그것들은 흘러가는 듯 보이지만 어느 순간 우리의 하루를 다시 비추는 작은 별이 됩니다. 기억은 과거를 붙드는 일이 아니라 오늘의 마음을 다시 숨 쉬게 하는 힘인지도 모릅니다.
사랑은 때로 눈 부신 햇살보다 겨울 아침의 엷은 서리에 더 가까웠습니다. 가까이 다가가면 금세 녹아 사라질 것 같지만, 그 짧은 반짝임 하나로 긴 계절을 견디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움도 그렇습니다. 슬픔만을 품은 감정이 아니라,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조용한 증언입니다. 그래서 그리움은 마음을 무너뜨리는 바람이 아니라, 다시 일어서는 나무의 뿌리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를 붙들어 줍니다.
이 책을 펼치는 동안 우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만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오래전 이름을 불러 보고 싶었던 사람, 끝내 전하지 못한 한마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이유 없이 떠오르던 얼굴 하나가 문득 시의 행간에 앉아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순간에는 시를 읽기보다 마음의 창문을 조금 열어두시기를 바랍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아도 향기를 데려오고, 침묵은 아무 말 없이 오래된 기억을 깨웁니다. 시 또한 설명보다 여백에서 더 오래 살아갑니다.
한 편의 시는 거대한 답을 내놓지 않습니다. 다만 작은 등불 하나를 건넬 뿐입니다. 그 등불은 누군가에게는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는 빛이 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앞으로 걸어갈 길을 비추는 새벽이 될 것입니다. 시는 상처를 지우지 않습니다. 대신 상처가 꽃을 피울 수 있는 계절을 기다리는 법을 조용히 사유합니다. 눈물이 흘렀던 자리에도 언젠가는 햇살이 머문다는 사실을, 말없이 곁을 지키며 들려줍니다.
이 시집 『어느 날 문득 사랑이 머문 흔적』은 지나간 시간을 붙잡기 위한 이름이 아닙니다. 삶을 지나며 우리 안에 남겨진 따뜻한 결을 바라보기 위한 이름입니다. 사랑은 끝났어도 그 사랑이 길러낸 다정함은 남아 있습니다. 만남은 멀어졌어도 그 만남이 키운 용기는 여전히 오늘을 살아가게 합니다. 그리움은 잃어버린 시간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어진 마음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또 하나의 여행입니다.
이 시집이 누군가의 외로운 저녁에 작은 창 하나가 되기를 바랍니다. 긴 침묵을 견디는 마음에 은은한 달빛 한 줄기가 되어 머물기를 바랍니다. 오래 굳어 있던 기억이 부드럽게 숨을 쉬고, 상처 입은 영혼이 스스로 다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끝나는 감정이 아니라 사람을 깊게 만드는 계절이며, 그리움은 멈추는 시간이 아니라 내면을 넓혀 가는 강물입니다. 모든 사랑과 모든 그리움은 이처럼 우리를 조금 더 따뜻한 존재로, 조금 더 깊이 타인을 품을 수 있는 존재로 이끌어 갑니다.
부디 이 시집의 한 편 한 편이 우리의 마음에 오래 머무는 작은 흔적이 되기를 바랍니다. 한 줄의 시가 하루를 견디는 숨결이 되고, 한 편의 여백이 삶을 다시 사랑하게 하는 고요한 용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책장을 덮은 뒤에도 시가 끝나지 않고 마음속에서 천천히 걸어가기를 바랍니다. 그 길 끝에서 문득, 오래전 스쳐 지나간 사랑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게 하는 새로운 희망의 온기를 만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