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잃은 여자. 소리를 잃은 남자.
두 사람에게 남은 것은 손바닥 하나뿐이었다.
1998년, 서울.
라디오 작가 서윤아는 스물여섯에 시력을 잃는다. 세상은 불쌍함과 동정의 속삭임으로 가득 찼고, 윤아는 그 안에서 질식해 갔다.
시각장애인 재활센터에서 만난 목수 강도진. 그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소리를 들어본 적 없는 청각장애인이다. 말 대신 나무를 깎고, 목소리 대신 손끝으로 세상과 대화하는 남자.
앞이 보이지 않는 윤아는 도진의 입술을 읽을 수 없다.
귀가 들리지 않는 도진은 윤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그래서 두 사람은 손바닥에 글씨를 쓴다.
한 글자씩, 천천히, 피부 위에 새기듯.
'괜. 찮. 아. 요?'
그 다섯 글자가 시작이었다.
손끝으로만 닿을 수 있는 두 사람의 세계에서, 가장 느린 언어가 가장 깊은 곳에 닿는다.
당신은 누군가에게 닿기 위해 얼마나 느려질 수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