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으로 가는 길, 수양대군과 나눈 그 밤의 대화가 모든 것을 바꾸었다. 학문으로 세상을 다듬던 손이, 이제는 권력의 바닥을 더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친 그 순간, 신숙주는 자신이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음을 알았다. 세종이 일군 문(文)의 시대는 끝났고, 무(武)의 시대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계유정난. 수양대군이 거둔 쿠데타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숙주는 도승지의 자리에 앉았다. 어린 단종을 보필하던 시절은 끝났고, 새 왕 세조의 곁에서 조선의 기틀을 다시 세우는 일이 시작되었다. 같은 밥을 먹고 같은 꿈을 꾸던 벗 성삼문이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 처형당했을 때, 신숙주는 그 시선을 끝까지 피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선택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다만, 그 길 위에 어떤 망설임이 있었는지, 그 망설임 끝에 어떤 결단이 섰는지를 있는 그대로 보여줄 뿐이다.
영의정의 자리에 오르고,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며, 건주위를 토벌하는 군사 원정에 이르기까지, 신숙주의 발걸음은 조선의 국경을 넘어 북방까지 뻗어나갔다. 차남 신면이 전사하는 아픔을 안고서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나라의 기둥이 되어야 한다는 사명이, 개인의 슬픔 위에 굳건히 서 있었다. 무(武)의 결단은 칼끝에서 끝나지 않았다. 전장에서 얻은 것이 다시 문(文)으로 돌아가, 국조오례의와 해동제국기로 완성되었다.
세조가 떠나고, 예종이 서고, 성종이 즉위하는 왕위의 변화 속에서도 신숙주의 붓은 멈추지 않았다. 충절과 생존 사이에서 치러야 했던 한 인간의 치열한 일생이, 마침내 문서의 형태를 갖추어 세상에 남기 시작했다. 죽은 벗들의 뜻을 살아남아 이어받은 증명. 그것이 국조오례의였고, 해동제국기였으며, 동국정운이었다.
보한재의 촛불이 흔들린다. 노년의 신숙주가 붓을 들어 자신의 길을 적기 시작했다. 있는 그대로. 자신이 본 것, 들은 것, 선택한 것, 포기한 것까지. 후대가 자신을 어떻게 부를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이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자신의 판단으로 자신의 시대를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