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한국행정학의 해석학적 거버넌스》로, 《한국행정학의 해석학적 이해》 발간 이후 그 내용을 공공행정, 정책분석, 거버넌스로 나누어 더욱 세부적으로 다룬 연구서의 하나이다. 한국행정학에 대한 해석학적 접근ㆍ현상학적 접근ㆍ비판이론적 접근ㆍ후기실증주의이론적 접근ㆍ포스트모던이론적 접근ㆍ정치경제학적 접근ㆍ국가론적 접근ㆍ문명론적 접근 등에 대한 한국행정학 연구시리즈로 출간한 내용을 더욱 심화시킨 것이다. 저자가 지난 50여 년간 행정학 교수로서 가르치면서 품어온 숙제를 정리한 책들의 하나이다. 한국행정학, 행정철학, 행정학 방법론, 행정이론 등을 교과목으로 대학의 학ㆍ석ㆍ박사 과정에서 가르치면서 그 난해한 내용을 보다 쉽고 명료하게 정리하여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오랜 기간 강의안을 바탕으로 원고를 써오던 것을 모아 이 책들을 펴내게 되었다. 이 책 집필과정에 특히 강신택 교수님께서 2019년에 저술하신 《한국행정학의 해석학적 접근》의 연구내용은 큰 도움이 되었다.
왜 지금 ‘해석적 거버넌스’인가 ?
21세기의 국가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초연결 네트워크는 사회 전반의 정보를 실시간으로 수집하고 분석할 수 있게 만들었으며, 정책 결정은 과거보다 훨씬 정교하고 신속해졌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능력의 확대는 통치의 안정성과 정당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많은 국가에서 시민 불신이 증가하고, 정책은 반복적으로 갈등에 직면하며, 제도는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작동하지 않는 경우가 빈번하게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은 행정이 단순한 기술이나 조직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사회의 의미와 관계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정책의 내용만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공정한지, 존중받고 있는지에 따라 행동한다. 행정이 이해되지 않으면 복종은 형식에 머물고 협력은 지속되지 않는다. 반대로 시민이 정책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면 최소한의 강제력만으로도 사회는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
이 책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전통적 행정학은 효율성과 합리성, 통제와 관리 기술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으며, 이는 근대 국가 형성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복잡성과 불확실성이 증가한 현대 사회에서는 이러한 접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다양한 가치와 정체성이 공존하는 사회에서는 단일한 해결책이 존재하지 않으며, 정책의 성공 여부는 기술적 완성도보다 사회적 수용성과 의미 형성에 달려 있다.
해석적 거버넌스는 행정과 정책을 객관적 해결책이 아니라 사회적 해석 과정으로 이해한다. 국가, 시장, 시민사회, 개인은 모두 현실을 특정한 방식으로 이해하며, 통치는 이러한 이해를 조정하고 공유된 의미를 형성하는 과정이다. 이 관점에서 행정은 명령 체계가 아니라 대화 구조이며, 정책은 규제가 아니라 서사이다.
한국 사회는 이러한 접근의 필요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압축적 산업화와 민주화, 정보화와 디지털 전환을 동시에 경험한 한국은 강력한 국가 역량과 역동적인 시민사회가 공존하는 독특한 구조를 형성하였다. 전통적 권위와 현대적 민주주의, 공동체적 가치와 개인주의, 국가주의와 시장 논리가 복합적으로 결합된 현실은 단일한 이론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따라서 한국행정학은 외래 이론을 적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국 경험을 해석하고 개념화하는 새로운 접근을 필요로 한다.
이 책은 철학적 해석학, 현상학, 비판이론, 구성주의, 정책 해석학 등 다양한 지적 전통을 통합하여 행정 현상을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특히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하고자 한다.
행정은 무엇에 의해 작동하는가? 정책은 어떻게 의미를 생산하는가? 권력은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시민은 국가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지능문명 시대의 통치는 무엇을 중심으로 해야 하는가?
이 책은 행정학을 관리 기술의 학문에서 인간 이해의 학문으로 확장하려는 시도이며, 동시에 한국행정학의 이론적 자립 가능성을 탐색하는 작업이다. 또한 AI 시대에 국가와 시민의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한 새로운 통치 패러다임을 제시하고자 한다. 행정은 법과 조직의 체계이기 이전에 의미의 체계이다. 그리고 그 의미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역사와 경험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된다. 이 책은 이러한 관점에서 행정을 이해함으로써,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국가가 어떻게 지속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는지 탐구하고자 한다.
이 책이 한국행정학의 성격을 바로 이해하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하기를 바라며 독자 여러분들의 아낌없는 조언과 질책을 기대한다.
2026년(단기 4359년) 5월 1일
심재한국학연구원에서
김 석 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