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 그 원인과 치유; 그리고 다른 에세이들(Civilisation: Its Cause and Cure; and Other Essays, 1889)
이 책은 사회 비평의 고전으로 ‘문명을 인류가 반드시 거처야 할 역사적 질병으로 규정하고 대지와 내면으로의 회귀를 처방한 산문집이다. 저자는 문명을 사유재산과 계급 지배가 시작된 약 천 년의 시기로 한정하며, 이 시기가 신체적 병약, 사회적 분열, 정신적 불안을 낳는 '통일성의 상실'이라고 진단한다. 특히 '건강(health)'이 'whole(전체)'·'holy(신성)'와 어원을 같이한다는 점에서 건강이 곧 통일성임을 강조하며, 현대 과학이 지성과 정서를 분리한 채 자연을 왜곡해 인식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치유의 길은 단순하다. 자연으로의 회귀, 노동과 소유의 단순화, 그리고 '공통 생명'에 기반한 공동체 사회의 회복이다. 저자는 라마르크적 진화론을 통해 내면의 욕망이 낡은 껍질을 벗는 '탈각' 과정을 설명하며, 규범이 아닌 삶의 실감에서 우러나오는 '새로운 도덕성'을 제시한다. 특히 주목할 것은 1920년 완전판에서 밝힌 낙관적 전망이다. 문명이 처음으로 전 지구를 덮은 오늘날, 대규모 공산주의 운동과 개인의 야성 회복이라는 두 흐름이 서로를 교정하며 자라나고 있어, 인류가 역사상 처음으로 이 질병을 통과해 더 높은 건강 상태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케임브리지 출신 성직자를 버리고 셰필드 교외에서 농사와 샌들 제작을 하며 살았던 카펜터는 휘트먼과 동양 사상, 러스킨 및 초기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간디와 올더스 헉슬리가 극찬한 이 책은 생태주의와 반문명론, 성 해방 담론의 선구로 평가받으며, 오늘날까지도 우리가 '진보'라고 믿는 것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